묵주기도 학교
성모님의 기도 학교
박상운 토마스 신부 전주교구 사목국장

묵주기도는 성모님의 기도 학교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입니다. 교회는 이 시기에 성모님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며,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참된 신앙의 가족으로 성장하도록 기도합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의 손을 잡고 복음의 장면들을 따라가며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과 삶을 배우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묵주기도는 “성모님의 기도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관상하는 기도”(「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3항 참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의 신비를 묵상한다는 것은 성모님의 학교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분의 신비를 깨달으며,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과 같습니다. 
주요한 기도인 성모송이 반복되는 동안에도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이 자리합니다.(「성모님 군단」 7월호, ‘은총의 비’ 참조) 신비를 하나씩 묵상할수록 주님의 얼굴은 우리 마음 안에 더욱 선명하게 새겨집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는 겉으로는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복음 전체의 깊이를 담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기도입니다.

성모님, 아드님의 따님이시며 첫 제자
성모님께서 위대하신 까닭은 단지 예수님을 육신으로 낳으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누구보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셨으며, 그 뜻을 온전히 실천하셨습니다.
단테는 「신곡」 ‘천국편’의 마지막 노래에서 성모님을 이렇게 찬미합니다.
“동정 어머니시여, 당신 아드님의 따님이시여”(「단테의 신곡」 ‘천국편’, 제33곡 1행).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하느님의 자녀이십니다. 육신으로는 아드님을 낳으신 어머니이시지만, 믿음 안에서는 아드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제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성모님을 “아드님의 첫 제자”(「구세주의 어머니」, 20항)라고 불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사도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부터 이미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피앗’(Fiat), 루카 1,38)라고 응답하셨습니다. 나자렛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셨고, 베들레헴에서는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아드님을 품으셨습니다. 카나에서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시며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셨고, 마침내 십자가 아래까지 아드님을 따르셨습니다.
묵주기도를 “성모님의 기도 학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친다는 것은 단순히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성모님처럼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에도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입술의 반복에서 삶의 실천으로
묵주기도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같은 기도를 계속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도 반복 기도는 자주 나타납니다. 시편은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 136(135),1)라는 후렴을 되풀이하고, 다니엘서의 세 젊은이는 불가마 속에서도 “주님의 업적들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하고 노래하며,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하나하나 불러 하느님을 향한 찬미에 초대합니다(다니 3,57-88 참조). 예수님께서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루카 18,1)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문제는 반복 자체가 아니라 입술의 기도와 실제 삶이 분리되는 데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태 15,8)라는 말씀은 단순히 기도 중에 생기는 산만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도 악을 버리지 않고, 정의를 외면하며, 고통받는 이를 돌보지 않는 삶이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의한 삶과 종교적 장엄함이 함께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입술의 기도에 머물지 않고 삶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환희의 신비를 바치면서 가정과 공동체에 기쁨을 나누지 않고, 빛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하지 않으며,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묵주기도의 참뜻을 놓치게 됩니다. 또한 영광의 신비를 바치면서도 부활의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 신비를 온전히 살아 내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거창하고 특별한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고, 외로운 가족의 말을 들어 주며,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가정과 공동체를 평화의 가족으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묵주기도를 “가정의 기도이며 가정을 위한 기도”(「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41항)라고 하였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녀와 함께 기도하며, 자녀의 성장과 삶의 여정을 묵주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맡기도록 권고합니다. 
묵주기도는 본성상 평화를 향한 기도입니다. 성모송이 고요하게 이어지면서 먼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그 내적 평화는 다시 가정과 공동체와 세상의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묵주기도는 우리를 평화를 바라는 사람에 머물게 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가족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즉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함께 십자가 앞에 머물고, 같은 신비를 바라보며, 같은 기도를 바치는 동안 가족들은 서로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말하지 못했던 상처를 용서하고, 서로의 고통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주장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게 됩니다.
묵주기도 성월을 지내며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성모님께 맡겨 드립시다. 성모님처럼 먼저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며, 작은 일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합시다. 묵주알을 하나씩 넘길 때마다 우리의 완고함과 미움도 하나씩 내려놓고,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새롭게 선택합시다. 그때 우리는 이름으로만 형제자매인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함께 실천하는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