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훈화
부활 대축일-부활 제4주간
윤진우 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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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우 세례자 요한 신부는 대전교구 소속으로 2014년에 서품을 받고, 로마 안셀모 대학교에서 전례를 전공했다. 대전 노은동성당 보좌, 대전 주교좌 대흥동 성당 제1보좌, 대전교구 사목국 부국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세종 도원성당에서 주임 사제를 맡고 있으며, 동시에 대전교구 전례 담당과 교구 전례꽃꽂이 지도 사제로 소임을 맞고 있다. 또한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전례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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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11일(주님 부활 대축일)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는 부활 인사

“주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부활 대축일에 서로 나누는 축하 인사말 안에서는 아주 깊은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미사 때 빛의 예식으로 ‘빛’을 받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전례 행위가 아닙니다. 바로 수난과 죽음을 뛰어넘어 부활이라는 영광이 우리 손에 전해진 것입니다. 
비록 사순시기 동안 더 많이 기도하지 못했더라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주님 덕분에 그 빛을 받았습니다. 곧 우리가 열심히 해서 영광을 취득한 것이 아닌 주님의 사랑 덕분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빛의 형상으로 희망과 사랑을 전해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카 성야 미사 중 사제가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외쳤을 때, 우리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빛에 감사드리고, 잃어버렸던 희망이 부활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축하한다고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떠올랐던 빛은 이제 나의 손으로 옮겨져 나의 일상 안에 구체적인 영광이 되어 오셨습니다. 달리 말해, 파스카 신비는 나와 상관없는 신비가 아닌 나의 손으로 움켜쥔 구체적인 신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 시기 동안 부활초를 바라보며 우리 또한 그 은총을 온전히 믿자고 초대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마주한 두려움과 아픔, 고생과 고통, 고민, 걱정, 분노, 쓰라림은 이제는 그 빛을 바라봄으로 치유하고, 장엄한 은총을 빛의 형상으로 전해주셨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묵묵히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 삶에 희망을 다시 심으십니다. 마치 봄비에 새싹이 움트듯, 마치 조용히 땅에 스며든 빗방울이 또다시 자연을 움직이게 하듯, 우리 또한 은총의 빗방울로 주님께 선물을 받아 갑니다. 
따라서 그 빛을 바라보고, 나아가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는 축하 인사는 이 모든 것을 믿고, 이 믿음을 서로에게 나눈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인사이기도 합니다. 이 인사말 안에 담긴 믿음과 신앙 고백을 이해하며 더 많은 이들과 이 기쁨을 나누는 부활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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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18일(부활 제2주간)
평화가 너희와 함께!

굳게 닫힌 문 사이로 주님께서 다가오시어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인사는 그저 형식적인 안부 메시지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주심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할 구원의 메시지이며,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두려움은 시시때때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가두고 있었는지 공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제자들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을지 모릅니다. 두려운 마음에, 상처받기 싫은 마음에, 또 다른 여타의 많은 이유로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그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오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전하십니다. 상처로 가득한, 불신으로 가득 찬 마음에 다가오시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세상에, 그리고 관계에, 경쟁에, 그리고 수많은 이유에서 생긴 나의 어둠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바로 “우리가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그대가 평화롭기를! 나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평화롭기를! 상처 나고, 억울하고, 답답한 그 마음에 평화가 열매 맺기를 바라며 평화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부활 대축일을 보내고, 교회는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제단에 부활초를 두고 그 빛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빛은 우리에게 주님의 평화를 선사합니다. 물론 여전히 삶의 어둠이 지배하고, 크고 작은 고민과 걱정으로, 그리고 말 못할 수많은 무게감이 짓누르기에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분들이라면 우리는 더욱더 이 빛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치 구약에서 구리뱀을 바라봄으로써 구원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리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구원받았던 군중들처럼! 우리 또한 마음의 어둠이 있다면, 그리고 걱정이 있다면 우리는 이 빛을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어둠을 주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통해서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기도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빛을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어둠을 물리쳐주십사 청하며 머무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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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25일(부활 제3주간)
주님,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

우리는 늘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늘 우리를 양육하시고 인도하시고 불러주십니다. 실제로 부활 제3주일 미사 화답송에서는 이렇게 환호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 이 말씀에는 우리가 아버지를 모시고 있음을, 나아가 늘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점이 이 구절 기저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길러주시는가? 그 답은 주일 복음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 주일 복음은 유명한 루카 복음 24장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 속에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대화를 나누고,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함께 머무르며 빵을 떼어 나누어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모습 속에서 깨닫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양육하시는 방법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미사 안에서 이렇게 말씀과 성체를 통해 날마다 성장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미사는 신자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늘 그 시간을 통해 양육 받는 고귀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미사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성체로 날마다 성장하고 단단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교우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미사 안에 분심이 든다고 자책하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그 마음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심이 든 자신을 의식하며, 성찰을 통해서 마주할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심이 든다고 하여 우리의 부모인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거두시겠습니까? 오히려 그 시간에 함께하고, 성장하고, 보호함이 주님의 온전한 목적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유혹 속에서도 미사를 자주 봉헌하고, 말씀과 성체에 자주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를 품으셨던 성모님처럼! 우리도 늘 그러한 머무름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우리 삶을 걸어 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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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5월 2일(부활 제4주간)
주님을 따라 걷는 길

성소 주일이 되면, 성직자, 수도자들, 신학생들의 부르심에 대해 묵상합니다. 제 부르심의 때를 되돌아보면, 정확히 어느 순간이다라고 말하기에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처럼 나 또한 사랑하고 싶다’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분명합니다. 누군가의 성장을 돕고, 또 누군가를 온전히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삶 자체가 매우 의미 있을 것 같았습니다. 물론 주님의 부르심을 마주할 적마다 늘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도 진행 중이고요. ‘이것이 과연 주님의 부르심이 맞을까? 아니면 그냥 나만의 착각일까? 그리고 이것이 정녕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일까? 아니면 나만의 생각에서 비롯된 선택일까?’ 이는 비단 사제로서 살아가는 저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늘 현실에서 불확실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숱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로에서 무엇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떠한 부르심에 따라나서느냐에 따라 사랑으로 나아가느냐, 욕심의 열매로 나아가느냐, 현실에 안주하느냐의 결과가 따르게 마련이죠. 그리고 그렇게 채워 나간 수많은 선택이 쌓여, ‘나’라는 인생에서 어떠한 향기를 드러내는지, 어떠한 사람으로 성장하는지가 차츰차츰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중요한 만큼 나를 향해 불러주시는 그 부르심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모범 답안이 곁에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목소리, 주님의 말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 곧 선택을 존중하시기에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우리의 선택을 좌지우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선택을 모두 존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이 온전히 완성되기 위해서 좋은 길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뜻을 잘 알기 위해 부르심에 집중할 때 비로소 주님의 가장 완전한 은총이 완성됩니다. 지금도 침묵 속에 부르시는 주님께 집중하며 오늘도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우리들이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