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예산의 넓은 들녘 한가운데 자리한 배나드리 성지(전담사제 나기웅 엘리야 삽교성당 주임)는 겉으로 보기에는 고요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 후기 혹독한 박해의 시간을 온몸으로 견뎌 낸 신앙인들의 숨결이 켜켜이 스며 있는, 한국 천주교 신앙사의 중요한 터전이다. 화려한 성당이나 장대한 조형물보다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오래된 침묵과 잔잔한 풍경이다.
‘배나드리’라는 지명은 ‘배가 드나들던 나루’에서 유래했다. 한때 사람과 물자가 오가던 길목이었던 이곳은 동시에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이 몸을 숨기고 마음을 모았던 은신처이기도 했다. 18세기 말, 천주교가 서학과 학문을 통해 조선 사회에 조심스레 스며들던 시기, 배나드리는 내포 지방 교우촌 형성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관헌의 눈을 피해 미사를 봉헌하고 교리를 나누던 평신도 신앙인들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믿음을 놓지 않았다. 이곳에서 신앙은 사상이 아니라 삶이었고, 선택이었다. 배나드리는 단순한 지명을 넘어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두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의 결단이 새겨진 이름이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내포 지방에서 배출한 많은 순교자 중 이곳 덕산현 주래(삽교읍 용동리)에서 출생한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선교 활동 중 1797년 정사박해 때 공주에서 체포되어 해미 순교지로 끌려가 1800년 1월 9일 63세로 순교하였다.

또한 배나드리에서 1817년 10월 20~30명 가량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중 민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순교하였다.
최근 인언민 마르티노 복자의 유해가 이곳과 깊은 인연으로 다시 우리 곁에 다가오면서 배나드리 성지는 오늘의 신앙을 깨우는 장소가 되었다.
지난해 12월 6일, 배나드리 성지에서 거행된 인언민 마르티노 복자 유해 봉송 예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앙 고백이었다. 먼 시간을 건너온 복자의 유해는 말없이 “끝까지 믿으라”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신자들은 그 길 위에 자신의 삶을 겹쳐 보는 시간을 가졌다. 유해 이동 행렬에 이어 총대리 한정현 스테파노 주교 주례로 삽교성당에서 봉헌된 유해 안치 미사는 순교가 개인의 영웅적 결단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지켜 낸 믿음의 열매임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한 신앙인의 증언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오늘의 우리에게 오히려 더 큰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 믿고 있는가.
배나드리 성지의 너른 하늘과 들녘은 과장된 언어 없이 순례자들에게 쉼과 묵상의 공간을 내어주며 순교의 역사를 전한다.
성지에 들어서면 두 손 모아 십자가를 든 마르티노 동상과 기념비가 눈길을 끈다. 기념비에는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라는 그의 마지막 말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따로 정형화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그 ‘비어 있음’은 오히려 순례자 각자가 자신의 삶 속 십자가를 돌아보게 한다.
배나드리 성지는 설명보다 침묵이 먼저 다가오고, 지식보다 체험이 앞선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신앙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내려옴을 느낀다. 누군가의 고통을 따라 걷기보다 자신의 신앙을 조용히 마주하도록 이끄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기도하게 된다.
배나드리 성지 전임 담당사제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최일현 루카 신부(비서실장)는 “배나드리 성지는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려 노력했던 인언민 마르티노 복자와 다른 순교자들을 하느님께서 기억하신다는 희망을 알려주는 거룩한 땅”이라고 말한다.
배나드리 성지는 일러 준다. 신앙은 특별한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를 살던 사람들이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선택의 역사임을. 그 역사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도 우리의 삶 안에서 고요히 이어지는 것이다.
순교의 피로 적셔진 이 땅 위에서 오늘의 신자들은 다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어떤 신앙의 터전을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가. 침묵 속에서도 깊이 말하는 성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자리. 배나드리는 오늘도 순례자를 기다리며 믿음의 뿌리를 돌아보고 그 위에 내일의 신앙을 정직하게 세워 가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천주교 대전교구 배나드리 성지
-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270-23
- 내포 천주교 순례길 2코스 중간에 위치. 입구에 스탬프 비치.
- 미사·식사 불가, 편의 시설 주차장과 화장실.
- 관할 본당: 삽교성당 ☎ 041-338-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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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위로부터)>
- 배나드리 성지 전경
- 인언민 마르티노 기념비(좌) 배나드리 성지 비문(우)
- 배나드리 성지에서 거행된 인언민 마르티노 유해 봉송식(좌)
유해 안치 미사를 위해 성전으로 이동 행렬(가운데)
유해 안치 미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