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영성 살기
어리바리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진영 세실리아 수녀 사랑의 씨튼수녀회

자연 안에 산책을 나설 때, 우주 만물의 존재들이 숨죽이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습니다. 매우 고요하지만 요동치는 설렘으로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나 살아있다고, 함께 살자고…. 공통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각자의 언어를 통해 말을 걸고 이에 귀를 기울일 때 소통이 시작됩니다. 알아차리고는 지나칠 수 없는 상호적 관계의 시작입니다. 멈춤, 느낌 그리고 쉼~ 창조 시기를 지나며 멈춰서서 다시 한번 바라보고 성찰하려 마음속으로 ‘작지만 거대하게, 소박하지만 담대하게’를 되뇌며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모든 것 안에서 창조주를 만날 수 있다는 축복으로 초대됩니다. 이는 전통은 지켜져야 하지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읽으며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끌어냅니다. 산다는 것은 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던가요? 과정 없는 결과는 없고, 과정은 견뎌내고 살아나는 것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이시고, 존재 자체로 상호 관계 안에 계신 존재입니다. 지지울라스는 “존재를 존재로 만드는 것이 친교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친교 없이는 아무것도, 하느님조차 실존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친교의 소중함을 피력한 것이지요. 
너는 무엇에 끌리고 있는가? 중력과 인력에 의해 지구와 사람에게 끌리는가? 그냥 이유 없이 같은 극성을 띤 자석처럼 존재를 밀어내고 있는가? 밀어내는 힘이 부정적으로만 작용하지 않고, 미는 힘으로 돌게 되는 회전력을 창출하고 에너지를 창출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가? 서로 간에 흐르는 에너지가 어떤 흐름을 갖고 작용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파장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에는 옳고 그름으로는 따질 수 없는 순수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에너지가 흐르는 것입니다. 
지난여름 내 맘과 머릿속에는 태풍이 몰아쳤지만, 다행히 휩쓸려가진 않았습니다. “평화와 희망의 씨앗이 되어주십시오.”라고 한 창조 시기의 주제 말씀이 이바지한 바가 큽니다. 나는 20대에 찬란한 30대를 기다리며 35세까지는 열심히 배우고, 그 후에는 그 배운 것을 풀어내고 살 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오늘 이 순간에도 배우고 있음을 압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임에 깊이 동의하고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또한 모든 피조물을 통해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희망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미래가 있다고도 합니다. 작가 고도원은 “희망의 언어는 반드시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포기하지 않게 한다. 포기하지 않는 삶의 태도로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희망의 언어는 ‘지금 여기’를 버티게 하는 힘입니다. 한강이 말한 것처럼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자를 구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미래의 과거가 되어 내일의 후손을 구할 차례입니다. 새로움은 완벽하게 짜인 빈틈에서 시작되지 않고 헐거워진 구멍에서 시작합니다. 어딘지 모자란 그곳에서 새로움이 창조됩니다. 자 우리 이제 다소 어설프고 어리바리하더라도 미래를 위한 밑바탕이 되고 숨 쉴 틈이 되지 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