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렸을 때 요즈음 학생들처럼 학원을 많이 다녔습니다. 아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욕심인지 배려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바이올린, 피아노, 그림, 컴퓨터, 웅변 등등 5~6개의 학원에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중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굳이 그랬어야 했느냐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컴퓨터 학원에서 가서 과제를 수행하던 중 문득 ‘아, 엄마랑 아빠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당시에 신입 복사로서 본당에서 활동은 하였지만, 그다지 신앙적으로 열심한 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1남 2녀 중 막내로, 큰누나와 작은누나랑 각각 10살, 9살 나이 차가 납니다. 어머니께서 당시 조금 늦은 나이인 36세에 저를 낳으셨기에, 또래 친구들 부모님보다는 거의 10살 차이가 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은연중에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봅니다.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과제고, 가방이고 내팽개치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계신 어머니께 저는 눈물, 콧물 짜면서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 아빠 죽으면 나는 혼자 어떻게 해?”
그때 어머니는 지금 제 나이 즈음 되셨을 텐데, 웃으시고 안아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서 엄마, 아빠가 우리 아들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당시의 저는 어렸기에 막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혼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가까운 가족이 나를 떠난다는 두려움이 있었나 봅니다. 아이가 울면서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엄마가 위로해주고 잘 마쳤으면 아름답게 끝났을 텐데, 그때부터 어머니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무슨 성모님에 대한 신앙 특강을 들으셨는지 아니면 성인전을 읽으셨는지, 엄마가 없으면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면 된다고 말씀하시며, 성모상을 보고 어머니라고 불러보라고 하시고, 레지오 협조단원으로 제 이름을 넣으셨습니다. 솔직히 그때 당시 누나들이 협조단원이 되어 묵주기도와 까떼나를 바치는 것을 보고, 나는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과 누나들을 골탕 먹이는 걸 재미있어했는데 막상 그 대상이 제가 되고 나니 무척 피곤했습니다. 밤마다 졸린 눈을 부여잡고 어머니의 협조단원이 되어서 묵주기도 5단을 바치고 까떼나를 바쳤습니다. 학교 다니느라, 5~6개 학원 다니느라 피곤한 애를 붙잡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라는 압박에 피곤했던 날을 몇 달간 보내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어머니와의 추억(?)이지만, 아직도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자녀가 느끼게 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세상에서 홀로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어머니께서는 성모 신심으로 아들에게 풀어주고 싶으셨던 마음이 있으셨나 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땅 위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종착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멀다고 느낄 뿐,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종착점에 이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야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죽음 다음의 세상에 대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모두 현세 다음의 세상에 대한 대답을 저마다 냅니다. 가톨릭교회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으로 지상에서의 삶이 끝난 다음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당연히 우리는 천국, 즉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기를 꿈꾸며, 가톨릭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시며,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 6)입니다. 그분께 희망을 두고, 그분을 소유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느끼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삶의 끝이 죽음에서 끝난다면 허무함 속에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사랑을 전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일원으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 세상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레지오 활동으로 성모님의 힘이 되고자 하는 이유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토록 귀한 선물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쁜 선물을 더 많은 사람이 알고 누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쁜 선물은 다른 사람과 나눈다고 해서 내 몫이 적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 나눌 때 성모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자녀가 될 사람이 더 많아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리 4, 4)”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선물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며 기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