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선배 신부님과 산책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산다”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바쁜 일상에서 어떤 재미나 즐거움 없이, 그냥 그렇게 기쁨 없이 하루를 버틴다고, 사람들을 견뎌낸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배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네가 누군가를 견디어 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너를 견디고 있을 수도 있어. 후배가 선배에 맞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선배들도 후배들 눈치를 엄청 보며 살아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견디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삶의 목줄을 쥐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비굴하리만큼 참고 인내하고, 견디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항상 곁에 있는 가족에게는 참고 견디는 것에 서투릅니다.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상처 주고, 쉽게 폭발합니다. 나만 피해를 보고, 나만 인내하며 참아낸다고 오해합니다. 그러고선 후회하고 스스로 아파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견뎌내고 있습니다. 서로가 상대를 참아내고 인내합니다. 나만이 아닌 서로가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무 일 없는 듯 견디기도 하고, 모든 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모든 것을 참아냅니다. 그 인내는 상대에 대한 이해일 수도 있고,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으며, 빼앗기지 않으려는 비굴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인내는 희망이 없으면 버티고 견딜 수 없습니다.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는 희망,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거라는 굳은 믿음이 오늘을 참아내고 인내할 수 있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내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이 인터넷 시대에, 시간과 공간은 언제나 현재하는 ‘지금’에 매여 있기에, 인내가 설 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경외심으로 피조물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인내의 중요성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절의 바뀜과 수확에 감사할 수 있고 동물의 삶과 그 성장 주기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또한 800년 전에 쓴 ‘피조물의 찬가’(Cantico delle Creature)에서 피조물을 대가족으로 인식하고 태양을 “형제”, 달을 “누이”라고 불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단순한 눈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내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우리가 부단히 견디며 하느님 약속을 굳게 신뢰하여야 한다는 맥락에서 인내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인은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로마 15,5)이신 하느님의 인내를 증언합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 우리의 희망을 지켜주고, 덕이요 삶의 길인 희망의 힘을 길러 줍니다. 인내의 은총을 자주 청하는 법을 배웁시다. 인내는 희망의 딸이며 동시에 희망의 굳건한 토대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4항>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갔다가 예루살렘에서 아들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사흘이 지나서 성전에서 어린 예수를 찾았을 때 그는 율법 교사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하자,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루카 2,50-51). 어머니는 아들을 다그치지 않습니다. 혼을 내지도,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참아내고 인내합니다. 그렇게 아들을 기다려 주고 아들의 생각과 의지를 바라봐줍니다.
서로를 인내하는 성모님과 예수님
그렇게 어머니 마리아는 평생 아들 예수를 견디십니다. 잉태의 순간(루카 1,26-38)에도, 성전에서 봉헌할 때(루카 2,22-39)도, 어린 시절 성전에서 아들을 잃어버리실 때(루카 2,41-52)도, 카나에서 자신의 청을 거절할 때(요한 2,1-12)도, 걱정되어 찾아갔지만 자신을 외면할 때(루카 8,19-21)도,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십자가 밑(요한 19,25-30)에서도 언제나 아들 예수님을 견디십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견디어 내십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짓눌려서, 아들과 불화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그냥 넘어가신 걸까요? 아닐 겁니다.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견디어 내신 것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묵묵히 바라봐주는, 그래서 아들을 믿어주는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서운하지만, 황당하고 당황스럽지만 그분께서는 아들 예수를 기다려 주고 참아내십니다. 또한 그 인내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믿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이루시려는 뜻을 지금은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지만 반드시 그 뜻이 존재함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희망 속에서 성모님은 견디고 버티며 죽음의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따르십니다.
예수님도 모든 사람을 참아내고 견디어 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당신의 어머니(요한 2,4)를 견디어 내십니다. 어머니뿐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견디어 내십니다(요한 6,60-61; 마태 20,17-28). 자기의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제자들 또한 견디어 내십니다(마태 26,36-46). 자신을 은전 30닢에 팔아넘긴 유다도 인내하십니다(마태 26,14-16). 마지막으로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도,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유다인(루카 23,34)까지도 그분께서는 견디어 내십니다. 예수님의 인내 또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도, 그들의 몰이해도, 그리고 그들의 배반도 견디어 내시고, 고통과 죽음을 감수하십니다. 또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절대적인 신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견디면서 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행복함을 맛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설렘과 기대 속에서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희망은 우리의 사랑과 믿음 안에서 인내를 통해 꽃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견디어 냅니다. 나 혼자만 견디고 참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나를 인내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왜 견디고 있는지, 왜 견뎌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그 기다림과 인내는 누군가에 대한 사랑 때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기다림과 인내는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