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IMF 때 직장이 매우 불안하여 마음고생이 심했었는데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돈보스코 형제님! 레지오 마리애 같이합시다”라는 부산교구 동래성당 선교부장의 입단 권유를 받고 즉시 입단하게 되었다는 최우영 돈보스코 형제를 만났다.
돈보스코 형제는 35세에 동래성당 천상 은총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으로 입단했다. 선배들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는 큰 힘이 되었으며, 매월 셋째 주일 오륜대 순교자 성지 복자수녀원에서 하는 봉사활동은 감사하는 힘을 주었다.
그 후 그는 성인 복사단과 직장 동료 및 지인들을 입교시켜 대부도 서고, 타 쁘레시디움에 입단도 시켰다. 한번은 아이들과 토요일 어린이 미사에 참석했는데 성전 감실등이 들어오지 않아 의아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보니 100볼트와 220볼트의 중간인 170볼트에 연결되어 복잡하게 얽혀있는 걸 해결하기도 했다. 그는 갖고 있던 여러 가지 장점을 활용하여 활동하다 보니 38세에는 성가정의 어머니 꾸리아 단장을 맡게 되었다.
“착한 돈보스코야, 꾸리아 단장해라!” 왕영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임 신부님의 말씀이었다.
화명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2002년 화명동으로 이사하여 화명동성당 성조들의 어머니 쁘레시디움 단원이 되었다. 신자 수가 증가하여 4개 꾸리아가 되면서 화명 구세주의 모후 꾸리아 단장을 맡게 되었다. 신 단원 유입에 따른 교육의 필요성을 신부님께 건의하여 본당 지원으로 1박 2일 양산 영성의 집에서 김기홍 신부님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2004년 화명성당에서 대천성당이 분당함에 따라 대천 사랑하올 모후 꾸리아 단장이 되었다. 첫영성체 가정교리 아버지반 봉사를 하면서 아버지들을 행동단원으로 모집하였고, 대건회 활동을 하면서 남밀양성당 소속 외산공소의 시설물 관리를 지금까지 하고 있다. 또한 보훈병원 목욕 봉사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 목욕 봉사는 코로나19 이후 중단되었다.
레지오 마리애 학교 교육부장을 맡아 단원 교육에 힘써
2010년 구포 예언자들의 모후 꼬미씨움 단장을 맡은 돈보스코 형제는 레지아에서 매년 운영중인 레지오 마리애 학교 교육부장을 맡아서 활동했다. 꼬미씨움 설립 30주년 행사를 계획하였고, 꼬미씨움에서 목포 산정동성당에 갔다가 맑은 하늘에 쌍무지개가 뜨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지인이 중국에 주재원으로 있어 방문한 것을 계기로 레지오 단원 교육을 하게 되었다. 산동성 칭다오시 청양성당(대구대교구 사제 파견)에서 단원 교육할 때, 같은 내용의 프린트 된 책을 가져가면 공안에 적발되는데, 교육교재 30권이 적발되지 않고 통과하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다. 참으로 신비한 체험이었다. 또 좌동성당에서 3년간 레지오 마리애 학교 강의를 했다.
돈보스코 형제는 본당에서 모르는 신자를 만나면 “어떻게 오셨습니까? 전입해 오셨습니까?”하고 여쭤보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제 단체를 소개하고 입단을 권면한다. 레지오 마리애 25년(출석률 90%) 근속상을 수상하였고, 증거자들의 모후 Pr. 회계를 맡고 있으며 지금은 평신도 회장을 맡고 있다.
돈보스코 형제는 5시에 일어나 바치는 소 성무일도는 ‘하느님의 뜻이 대천성당 공동체와 일치하기를’을 지향으로 기도하고, 출근길에 묵주 5단, 점심시간 만 보 걷기를 하면서 5단을 바친다. 퇴근 후 저녁에 바치는 소 성무일도는 ‘가족의 화합과 건강을 위하여’를 지향으로 기도한다.
3대가 함께 살다 보니 교구에서 주는 성가정 축복장도 받았다. 96세 어머니와 부인 소피아 자매, 아들 둘은 감사와 또 감사의 상징이다. 정년퇴직 후 일자리가 있어 감사하고 공동체에 봉사할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린다.
항상 미소를 머금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서 모범적인 희생과 활동으로 이끌어 주신 손완호 미카엘 형제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평범한 활동인데 불러주었다며 감사를 전하는 돈보스코 형제에게서 따뜻한 성모님의 향기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