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영성 살기
희망이 되는 확장
이진영 세실리아 수녀 사랑의씨튼수녀회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신 분,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신 분,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신 분,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치네”(시편 145,8-9)
지구 공동체는 창조의 경이로운 아름다움 안에 있으나 고통 또한 품고 있습니다. 46억 살의 지구가 생명의 역사와 함께 죽음과 고통의 역사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참으로 많은 아름다움을 간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좌절과 외로움, 상실, 전쟁과 폭력, 여러 종류의 차별 등 고통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물론 삶을 통하여 십자가 뒤에 부활이 오듯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 뒤에 웅장하게 살아 숨 쉬는 생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아무리 경이롭고 아름답다고 해도 고통이 충격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때에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다가오는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분노하게 하는 것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자잘하게 다가오는 폭력이라고 느껴지는 현실 앞에서 ‘짜부러지지 않는 고귀한 생명을 품어 낸다’라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과연 희망한다고 그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질문은 의미가 있는가? 곰곰이 머물러 봅니다.
다 베어내고 부러진 가지에서 빼꼼하게 내민 새싹의 경이로움을 만나며 복잡함으로 가득한 뇌를 씻어내듯 한가지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눈앞에 밀가루 반죽을 동그랗게 만들어 칼국수를 만들어 가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밀가루에 물을 적당히 넣고 반죽을 동그랗게 만들다가 위에서 꽉~ 압력을 가하니 그 반죽은 저변이 조금씩 확장되어 바닥이 점점 넓어집니다. 누르고 짜부러뜨릴 때 넓게 펴지는 밀가루 반죽을 상상하며, 무엇인가를 억압하고 억누를 때 그 저항은 확장되는 바닥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억압 속에서 작아지고 없어진 듯 보이지만 그것은 저항하며 더 크고 넓은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풀뿌리 민중들도 그러합니다. 미약하여 누르면 작아지고 드러나지 않게 보이지만 억압이 심해지면 저변에 확장된 힘들이 연대합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는 순간 어느새 답답함은 사라지고 빛이 환하게 밝혀집니다. 상큼한 공기가 웃음을 짓게 합니다. 십자가 죽음 뒤에 부활하시고 못 자국을 만져보라 하신 예수님을 만난 토마스처럼 불신의 단단한 껍질이 벗겨지고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만나게 됩니다. 붕괴 속에 돌파구를 주시는 성령을 알아차리는 순간입니다.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시고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신 분이십니다. 울부짖는 이들을 곤경에서 구해주시는 분입니다. 끝까지 함께 하실 주님과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갑시다. 바닥이 되는 것이 있어야 집을 지을 수 있듯이 바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갈 때 비로소 튼튼한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우리의 유한한 정신으로 무한하신 분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유한한 마음은 무한한 사랑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성령의 힘은 단순히 지배하는 힘으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힘을 주는 사랑으로 작용합니다. 바닥이 되는 두려움을 버리고 희망이 되어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