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마을이 자리한 서울 종로구의 가회동성당(주임신부 황중호 베드로)은 한국 천주교 초기 신앙의 중심지이자, 감격적인 첫 공동체 미사가 봉헌된 성지이다.
1794년,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사제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1752~1801)가 중국에서 입국해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한국 천주교회의 첫 공동체 미사를 집전한 장소가 바로 이곳 가회동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7일, 한영익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 체포령이 내려졌고, 신자들은 주문모 신부를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시켰다. 당시 집주인이었던 최인걸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를 대신해 체포되는 희생을 택했다. 같은 날, 입국을 도운 조선교회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도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하루 만에 순교하였으며, 이 사건은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의 서막인 을묘박해로 이어졌다.
놀라운 역사의 반전은 조선왕조의 후손들 가운데 천주교에 귀의한 인물이 많다는 사실이다. 고종의 여섯 자녀 중 넷이 천주교에 입교했다.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은 1955년, 가회동성당에서 박병윤 보좌신부로부터 ‘비오’를 세례명으로 세례받았다. 같은 해, 의친왕비 김숙도 역시 ‘마리아’로 이곳 가회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고종의 셋째 아들 영친왕 이은도 1961년 일본 도쿄에서 프란치스코회 석종관 신부에게 ‘요셉’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는 ‘마리아’로 대세를 받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가 선종 이틀 전 엘리사벳으로 대세를 받고 하느님 품에 안긴데 이어 고종과 염 상궁 사이에 태어난 황녀 이문용도 1970년 전주에서 김환철 신부에게 ‘마리아’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앙 안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로써 고종의 자녀들 가운데 어린 시절 병사한 완화군과 1926년 선종한 마지막 임금 순종을 제외한 모두가 천주교로 입교한 것이다. 한때 조선 왕실과 관료들이 서양 학문의 일부로 이 땅에 소개한 천주교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혹독한 박해를 받았지만, 그 마지막 후손들이 하나둘씩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감동적인 결실을 맺었다.
가회동성당 관련 성인 3위, 복자 18위
가회동성당의 주보 성인은 선교사업의 수호자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며, 한국 천주교 초기 순교자들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복자 강완숙 골롬바, 복자 최인걸 마티아 세 분의 복자도 공동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이 성당은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 모범을 보여준 복자들의 삶을 기리며 그 영성을 본받고자 한다. 신앙의 유산을 계승하고 순교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가회동성당 1층에는 역사 전시실이 운영되고 있으며, 한쪽에서는 약 15분가량의 영상도 상영된다. 성체조배실에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곳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지인 새남터와 상징적으로 연결되는 공간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를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장소다.
‘사학징의’, ‘벽위편’, ‘추안급국안’ 등의 문헌을 통해 거주지가 확인된 서울 지역 천주교 신자 197명 가운데, 현재 가회동성당 관할인 북촌 지역에 살았던 신자는 총 61명이었고, 그중 18위 순교하였다. 124위 순교복자에 시복된 이는 15위에 달한다. 여기에 첫 미사와 관련해 순교하신 복자 주문모 야고보,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까지 더하면 가회동성당과 직접 연관된 순교복자는 총 18위에 이른다. 또한, 19세기 중후반 박해로 시성된 103위 성인 가운데 북촌 거주 성인은 정하상 바오로, 정정혜 엘리사벳, 현석문 가롤로 등 3위다.
이처럼 가회동성당은 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을 상징하는 성지이자, 우리나라 초대 교회의 신앙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사적지로, 오늘날에도 수많은 신자들에게 믿음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내어주는 어울림 공간
가회동성당은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소박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한옥과 양옥이 조화를 이루며,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선비와 벽안의 외국인 신부가 어깨동무하는 형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동서양의 정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도심의 각박함 속에서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으로, 퇴근길이나 주말 오후 동네 산책 중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편안히 쉬어갈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동네에 어울리는 집이기를 바랐던 가회동성당은 북촌로 풍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종교 건축 특유의 위압감을 덜어냈다. 문턱을 낮춘 덕분에 신자가 아니어도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으며, 성당 입구에 마련된 화장실도 상시 개방되어있다.
다만, 미사와 기도를 위한 성전은 개방된 구조는 아니며, 앞마당을 지나 긴 계단을 올라와서야 들어갈 수 있게 설계되어 경건함을 유지하고 있다. 약 300석 규모의 성전은 인공조명 없이도 자연 채광이 들어오며, 짙은 황토색 목재 벽과 어우러져 아늑하면서도 묵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전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성당 신자인 조각가 신명덕이 만든 부조가 두 짝의 큰 문에 새겨져 있다. 이는 신약성경의 4복음서를 상징하는 형상으로 표현되었으며, 단순한 출입문을 넘어서 말씀을 맞이하는 상징적 문으로 기능한다. 제대 위에는 십자고상이, 2층에는 양팔을 활짝 벌린 예수 성심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옥 앞마당 한쪽에는 성모자상이 세워져 있다. 이 모든 성상은 본당 출신 작가 임송자 리따의 손에서 빚어진 것으로, 성당 곳곳에서 신앙의 깊이를 더해준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포한 정기 희년을 맞아, 가회동성당은 서울 도보순례길 가운데 1코스 ‘말씀의 길’의 마지막 종착지이자 2코스 ‘생명의 길’의 출발 성지로 지정되며, 순례자들이 선조들의 신앙을 되새기고 오늘의 삶에서 그 의미를 되찾을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이처럼 가회동성당은 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을 상징하는 성지이자, 초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가 살아 있는 성지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하느님의 은총이 스며든 일상의 성전으로, 신자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참된 평화와 위로를 만날 수 있는 길목으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사진 설명(위로부터)>
_ 가회동성당 성전
_ 앞마당의 성모자상
_ 가회동성당 주보성인(좌) 성체조배실(우)
_ 성전 출입문(좌) 성전 앞 예수 성심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