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하바쿡 예언서
여한준 롯젤로 신부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 대구 Se. 담당사제

시대 배경의 이해 
지난 호, 나훔 예언서에서 아시리아가 얼마나 무자비한 폭력으로 다른 민족을 억압했는지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시리아의 권세가 기울어 갈 무렵, 이집트와 신흥 세력 바빌론이 패권 다툼을 위한 힘겨루기가 있었습니다. 결국 기원전 612년에 수도 니네베를 무너트린 바빌론은 609년에 아시리아를 완전히 점령하고, 605년에 카르크미스 전투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를 물리침으로써 근동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로써 유다를 괴롭히는 나라는 아시리아나 이집트가 아니라 바빌론으로 교체되었습니다. 
한편 기원전 609년에 이집트의 힘을 등에 업고 유다 임금이 된 여호야킴(기원전 609-598)은 나약하면서도 무자비한 독재자였습니다. 원래 친이집트 세력이었던 그는 바빌론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집트와 동맹을 맺으면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지만 오히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바빌론의 견제를 당하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605년 이후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꼭두각시가 되어 자국민들에게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정치권에서는 친이집트파와 친바빌론파 간의 세력 다툼이 벌어지던 시대였습니다.

하바쿡의 탄원과 하느님의 응답 
유다를 억압하는 외부의 적 바빌론과 백성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임금 여호야킴, 그리고 예루살렘 내에서 벌어지는 친이집트파와 친바빌론파의 정치 놀음이라는 다각적 불의와 고난 속에서 하바쿡 예언자는 두 가지 질문으로 탄원하며 하느님께 응답을 요구합니다. 악이 가득하고 불의가 만연한 현실에 관한 질문을 악을 부추기는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던지며 그 해답을 찾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상황을 개선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바쿡 예언자의 첫 번째 탄원은 “언제까지~”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1,2) 분명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인간이 바라는 세상은 아름답고 정의롭고 선한 것으로 채워진 세상인데 “왜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처벌받지 않고 지속되는가?”를 질문형식으로 호소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당시 ‘칼데아인들’이라고도 불리던 바빌론을 일으켜 폭력과 횡포를 휘두르는 정치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이 장차 무서운 벌을 받게 될 것이라 응답하십니다. ‘표범보다 날렵하고 저녁 이리보다 민첩한 기병’(1,8 참조)처럼 강력한 위력을 과시하는 바빌론은 하느님 심판의 도구로 적격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바빌론은 하느님 심판의 도구로 적합했을까요? 만약 바빌론이 정도를 넘어선 폭력과 불의를 자행한다면 그것은 원래의 악을 새로운 악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바쿡 예언자의 두 번째 탄원은 “어찌하여~”입니다. “당신께서는 눈이 맑으시어 악을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잘못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시면서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1,13) 하느님께서 유다를 벌하기 위한 심판의 도구로 삼은 바빌론이 ‘배신자가 되어’ 아시리아처럼 다른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사람들을 모두 낚시로 낚아 올리는 악한 파괴자’와 같은 착취와 학살을 저지르자, 예언자는 “어찌하여 하느님은 심판을 위해 악한 도구를 사용하는가? 어찌하여 의로운 이가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악행을 묵인하는 하느님 때문에 괴로워하며 ‘보초처럼 성벽 위의 초소에 서서’(2,1 참조) 하느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끈질기게 기다리며 버티겠다는 하바쿡을 향한 하느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2,3) 하느님께서는 기다리라고 하시며, 곧바로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실현될 환시를 누구나 막힘없이 읽을 수 있도록 판에다 기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즉시 눈앞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언젠가 반드시 오고야 말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며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2,4)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며, 그 악으로 인해 의인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세상이 이렇게 불의 속에 숨을 헐떡이는데,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이런 고통을 침묵으로 허용하는 하느님이 어떻게 선하신 분일 수 있는가?”
하바쿡 예언서는 이 같은 문제에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존중해야 할 신비로 남겨둘 뿐입니다. 그러면서 의로운 사람은 성실함을 간직하라고 가르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받아들일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분 약속에 희망을 걸고 기다리는 성실한 사람이 의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성실함이란 어떤 어둠과 고통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기다려라.”하신 하느님의 응답은 낙담과 좌절 속에서 잠자코 있으라는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불의와 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라는 역동적 태도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하바쿡 예언서는 다섯 가지 불행 선언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때가 반드시 도래할 것을 확신하며 기쁨에 찬 아름다운 노래(3장)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자신의 메시지를 마무리합니다. 희망찬 기다림이기에 예언자는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하느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약속이 성취될 기미가 보이고, 정의가 실현될 증거가 보여서 기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믿고 희망하기에 기쁠 수 있다는 것이 하바쿡 예언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지혜가 아닐까요?
인류 역사 안에서 불의와 악이 없었던 시대가 과연 있었을까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언제까지? 어찌하여?’라는 탄식과 함께 각자의 시대를 살아냈습니다. 이런 탄원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허망한 탄식의 소리이지만,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희망찬 탄원이어야 합니다. 빛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조차 희망을 잃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들어달라고 구하는 신앙의 탄원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의 기다림은 절대 지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