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가는 웰다잉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종종 다가오지 않을 먼 훗날의 이야기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사이 사이에 있습니다. 죽음의 불확실성은 죽을 死(사) 한 글자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죽을 死(사)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一(일), 저녁 夕(석), 비수 匕(비). 이를 풀어보면 ‘어느 날 저녁에 갑자기 날아올지 모를 비수’ 같은 것이 죽음이라는 뜻과 같습니다. 인디언 속담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이 먼저 올지 다음 생이 먼저 올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처럼 오늘의 하루는 우리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웰다잉, 즉 잘 죽는다는 것은 결국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두봉 주교님, 프란치스코 교황님, 유의배 신부님
2025년 4월 10일, 향년 96세의 나이로 두봉 주교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한국 땅에 깊은 사랑을 심으신 그분은 마지막까지 단순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는 이 땅의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살며 농민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활동에 헌신하셨습니다. 그래서 ‘푸른 눈의 성자’라고 불리셨던 주교님은 선종 직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하느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2025년 4월 21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서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신다’라고 말씀하셨던 교황님은 생전 검소한 삶의 태도 그대로, 바티칸 대성당이 아닌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안장되셨습니다. 생전에 교황님은 교황 장례 전례를 대폭 간소화했고, 삼중관 대신 목관을 선택하며, 교황청의 형식과 권위보다도 ‘함께하는 가난한 교회’를 강조했습니다.
1976년 한국으로 파견되어 40년간 성심원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동고동락했던 유의배 신부님의 작은 방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이 문장은 한평생을 가장 낮은 이웃들과 함께했던 신부님의 삶과 믿음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이분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삶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15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인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잘 사는 삶의 첫 단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존감과 죽음 불안, 그리고 나눔과 베풂
심리학에서도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자존감과 죽음 불안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결과 자존감이 높을수록 죽음 불안이 낮고, 자존감이 낮을수록 죽음 불안이 높다는 연구입니다. 그래서 웰다잉 교육의 목적 중 하나는 참여자의 자존감을 높여 죽음 불안을 낮추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자존감은 이타적 행동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와 연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사랑과 헌신, 나눔과 베풂의 삶을 사는 사람일수록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받는 데 익숙한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세지고, 나누고 베푸는 사람일수록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자존감이 높아질수록 죽음 불안이 낮아집니다. 나아가 이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를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와 연결됩니다. 베풂은 타인과의 연결을 확인하게 하고, 그 연결 속에서 우리는 고립이 아닌 소속감을 느끼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는 과정은 바로 이 관계성 안에서 출발합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의미 있는 존재였는가?’라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수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인터넷에 화제가 되었던 어느 초등학교 3학년 아이의 답안지가 생각납니다. ‘바닥에 떨어진 빵조각을 주워 먹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를 보며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써보라.’라는 글쓰기 과제에 아이는 이렇게 대답을 썼습니다. “남의 아픔을 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같이 아픔을 해결해 주려 하고 같이 잘 먹고 잘살아야 될 것이다.” 이 짧은 문장에는 아이가 꿈꾸는 천국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가 꿈꾸는 천국이 아이가 꿈꾸는 천국과 같을까요?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만들 수 없다면, 세상 그 어디에도 천국은 없다.
20세 인도의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는 말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만들 수 없다면, 세상 그 어디에도 천국은 없다.” 천국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지만, 지금 이곳,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실천을 통해서도 존재합니다. 매일의 작고 따뜻한 선택들 -한 사람을 위한 미소, 누군가를 위한 기다림, 나누고자 하는 의지- 그것이 곧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과도 같습니다.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천국 문지기가 묻는 두 가지 질문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그리고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는가?” 이 질문은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가장 큰 나침반이 되어 줍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우리는 이 길에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10장 3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 나눔은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의 증거이며, 베풂은 신앙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신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두봉 주교님, 프란치스코 교황님, 유의배 신부님, 테레사 수녀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분들이 보여주신 삶은 ‘주님께서 바라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산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의 순간까지 사랑을 실천하며,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 속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주어진 순간순간을 소중히 살아간다면, 우리의 마지막도 기쁨과 평화로 채워질 것입니다. 천국으로 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