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란 하느님의 가장 큰 은총이다. 어떤 만남이든 소중하고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직접적인 만남도 있지만 책이나 영화를 통해 다른 인물과 간접적으로 만나기도 한다. 특히 성경 속에서 만나는 인물도 다양하고 재미있는 분들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특별한 인간일까? 그러나 그들과의 만남이 지속될수록 성경의 인물도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지닌, 아니 우리보다 못할 수도 있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성경의 인물은 분명히 과거의 존재들이다. 그런데 상상과 생각 속에서 때때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의 모습이다. 그래서 약하고, 죄 많고, 약점 많은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성경의 인물들이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오래전 가톨릭평화신문에 성경의 인물에 관한 글을 2년여 매주 연재한 적이 있었다. 당시 편집자의 주문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좀 더 인간적으로 소개하되 성경에 직접 쓰이지 않은 행간(行間)을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말이 쉽지, 내가 성경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그게 가능키나 할까.’ 하지만 뭐에 홀린 듯 덜컥 승낙한 뒤라 물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연재 기간 내내 성경 속 등장인물에 요즘 말로 빙의된 것처럼 일주일을 보내며 원고를 쓰고, 또 새로운 인물을 물색(!)하며 지내야 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 가톨릭신문에 성경의 인물을 다시 연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시 만난 성경의 인물들이 완전히 새롭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20년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도, 새롭게 깨달아지는 부분도 많았다. 참 신비로운 일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한결같이 인간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다.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 같다. 울고 웃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질투하고 때로는 죄 속에서 몸부림치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영락없는 한 인간이다. 성경에 기록된 이들이 죄와 어둠의 구석을 지니고 있다는 건 오히려 나에게 위안이 된다. 길을 나서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보통의 인간이 바로 성경의 인물이었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한결같이 인간적인 매력 지녀
신앙인이라면 한결같이 신앙의 성조(聖祖)라고 존경하는 아브라함의 삶은 참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창세 12,1-3) 사실 말씀뿐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니 믿는다는 것뿐이었다. 하느님이 약속하신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상상할 뿐이었지 실제 가보지도, 체험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하느님께서 “너의 자손은 하늘의 별 수만큼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하고 말씀하셨는데 당시에는 아브라함과 아내에게 아들이 한 명도 없었다. 이처럼 불가능한,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는 당시에 문화가 발달하고 물질이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은 듣도 보도 못한 척박한 곳으로 떠나라는 하느님의 청천벽력 같은 부르심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것은 75세의 일이다(창세 12,1-4). 그 나이에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어딘지도 모르는 미지의 장소로 떠나라는 명령은 절망과 같은 것이었다.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는 솔직히 두렵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부르심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있다. 아브라함은 수없이 “왜? 하필 저입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의 말씀 하나만을 굳게 믿고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고향을 막상 떠나고 나니 모든 게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기근이 들어 식구들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아브라함은 첫 번째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외모가 수려했던 그의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이기로 했는데, 이집트의 권력자가 사라를 차지하기 위해 아브라함 일행을 모두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라는 파라오의 아내가 되고(창세 12,19) 그 덕에 아브라함은 많은 재물을 얻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큰 재앙을 맞아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파라오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무사히 돌려보낸다. 하느님의 개입으로 가족 모두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다.
신앙의 성조 아브라함도 그저 약한 한 인간이며 신앙인
그 후 아브라함은 일생에 또 한 번 씻지 못할 큰 잘못을 저질렀다. 시간이 지나도 하느님이 약속하신 아들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라는 여종인 하갈을 소실로 들였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가족은 불행과 고통의 늪으로 빠진다. 오랜 시간 후에 하느님이 계획하신 아들 이사악을 낳지만 아브라함은 인생의 최고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어서 얻은 아들 이사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런 자식이건만 하느님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다(창세 22,1-2). 아브라함은 아마도 이렇게 부르짖었을 것이다. “하느님, 너무 잔인하십니다. 이사악을 주실 때는 언제고 왜 다시 그를 죽이라는 겁니까? 차라리 아비인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일생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가 행복하시길 원하신다는 것이었다. 지금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느님은 더 깊은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칠 것을 결심한 순간 오히려 갈등과 번민이 걷히고 담담해졌을지 모른다. 그를 여태까지 감싸고 있던 부자유스러운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자유로움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세상을 넘어서는 그런 느낌이었을까. 사실 아들 이사악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브라함은 사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셈이었다. 후대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성조라고 부르지만 그저 약한 한 인간이며 신앙인이었다.
신앙이란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나가는 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죄인인 채 하느님께 나가는 길이다. 중요한 건 언제 어느 때라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그것이 바로 나의 인생의 가장 큰 위로이고 힘이다.
<그림 도메니키노 ‘이사악의 희생’(1627년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