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스바니야 예언서
여한준 롯젤로 신부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대구 Se. 담당사제

시대 상황
“아몬의 아들, 유다 임금 요시야 때에 스바니야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1,1) 기원전 8세기, 유다 임금 아하즈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신흥 강국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유다는 멸망은 면했지만, 강대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하즈의 뒤를 이은 히즈키야는 아시리아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후계자 므나쎄의 통치 때 유다 왕국의 상태는 최악의 상태에 이릅니다. 55년이나 왕좌를 지켰던 므나쎄는 다시 친아시리아로 돌아서 각종 우상과 이교 관습을 들여왔고, 이런 상황은 므나쎄의 아들 아몬까지 이어집니다. 결국 아몬은 신하들의 반역으로 궁전 안에서 살해당했고, 기원전 640년 요시야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630년경 여전히 선대 임금들의 악습의 흔적이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을 때, 스바니야 예언자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스바니야는 바알 숭배, 인신 제사를 바친 밀콤 숭배, 다양한 종교 혼합주의와 백성들의 교만을 고발하며 심판을 예언합니다. 그래서 스바니야의 활동이 훗날 기원전 622년에 단행된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스바니야 인물
“스바니야는 쿠시의 아들, 쿠시는 그달야의 아들, 그달야는 아마르야의 아들, 아마르야는 히즈키야의 아들이다.”(1,1) 머리글에서는 스바니야의 아버지 이름만이 아니라, 사 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조부의 이름까지 언급됩니다. 그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한 히즈키야 입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히즈키야가 유다 임금 히즈키야를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 히즈키야를 유다 임금 히즈키야와 동일인으로 본다면 스바니야 예언자는 왕족이며, 요시야 임금과 친족 관계가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농부나 지방 출신의 예언자가 사회 불의와 지도층을 고발한 것과는 다른 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스바니야의 예언은 자기 검열과 내적 성찰이 기반이 된 사회 비판과 고발인 샘입니다.

주님의 날 선포
“나는 모든 것을 땅 위에서 말끔히 쓸어버리리라.”(1,2) 스바니야서는 엄중한 심판 선고로 시작합니다. 특히 땅 위의 모든 생명체를 향해 “쓸어버리다”, “없애버리다”와 같은 동사를 사용하면서 하느님의 무서운 현존을 강렬하게 묘사하며 그 심판이 모든 피조물을 향합니다. 
이어서 하느님의 경고와 심판의 말씀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집중합니다. 므나쎄와 아몬이 저지른 악행의 잔재로 남아있던 바알 및 그 밖의 우상 숭배 그리고 별과 천체를 숭배하는 예식에 참여하고, 주님과 밀콤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 형태의 종교 행위에 빠져있고,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찾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주님의 날’이 선포됩니다. 
“주님의 위대한 날이 가까웠다.”(1,14) “그날은 분노의 날, 환난과 고난의 날, 파멸과 파괴의 날,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먹구름의 날이다.”(1,15) 주님의 날은 한 마디로 심판의 날입니다. 원래 심판은 이방인과 이스라엘 민족의 전쟁에서 당신 백성을 이끄신 하느님의 승리와 함께 이방인에게 주어지는 패배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날은 적대자들에게는 파멸이, 이스라엘에는 구원이 주어지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계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에게 주님의 날은 더 이상 구원이 아니라 파멸로 주어집니다. “주님의 분노의 날에 그들의 은도 그들의 금도 그들을 구하지 못 하리라. 온 땅은 주님의 열정의 불에 타 버리리라. 주님은 세상의 모든 주민에게 정녕 무서운 파멸을 내리리라.”(1,18) 이런 파멸의 심판이 선고되는 이스라엘은 이제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할까요?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구원할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들’에게 남겨두십니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3,12) 구약 성경에서 부(富)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의 표지로 여기던 전통을 넘어서며 스바니야서는 가난의 긍정적인 의미를 밝혀줍니다. 이는 백성을 올바로 이끌어야 하는 유다의 부유한 지도자들에게서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분노의 날이 실현된 후, 부끄러운 죄악을 저지른 이들은 심판으로 사라지고 가련하고 가난한 백성만이 남게 되며 이들을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이 일어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작의 단초가 될 ‘가련하고 가난한 백성’은 누구일까? 
바로 “주님의 이름에 피신”(3,12)하는 자들입니다. 어떤 위험과 위협 앞에서 우상을 찾거나, 재산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이름으로 피신하는 이들로서 하느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던 사람입니다. 이런 남은 자들 덕분에 이스라엘은 재건되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3,14)

스바니야서의 지혜
구약 시대 말기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며 하느님 사랑의 율법을 정치 운영 수단으로 휘두르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가련한 한 여인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어린 소녀로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을 위해 자신을 봉헌한 성모 마리아입니다. 세상의 제도와 구조, 지도자들과 기득권자들에게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품지 못할 때, 하느님의 시선은 ‘가련하고 가난한 사람’을 향했고, 그에게 구원의 희망을 걸었습니다.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과연 우리가 어디에다 희망을 걸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이 시대의 가련하고 가난한 백성, 겸손하고 가냘픈 순명의 소녀를 찾고 계시지 않을까요? 성모님을 따르는 군대인 레지오 마리애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시대의 가련하고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청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