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
웰다잉을 공부하면서 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로,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여의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퀴블러 로스가 유명해진 계기는 200명의 죽음을 마주한 환자들과 함께한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5단계’ 이론을 발표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이 이론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변화를 다음과 같은 5단계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부정’입니다. 본인이 더 이상 치료가 어려운 말기 상태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분노’입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라는 생각에 분노하며 원망하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타협’입니다. 기도나 신과의 거래를 통해 남은 생의 기간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는 ‘우울’입니다.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아 병세가 악화되며 우울함에 빠지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수용’입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단계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며 각 단계에서 멈춰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단계는 죽음을 맞는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 인간의 심리는 기계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며 모두가 이런 과정을 밟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의 5단계 이론은 죽음 연구에 있어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임종을 앞둔 이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후 독일 출신의 학자이자 40년 동안 생사학을 연구해온 일본 상지대학교 교수 알폰스 데켄 신부님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이론에 덧붙여 ‘수용’ 이후 ‘희망’의 단계가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를 넘어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며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목격합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인간이 죽음 앞에서 마지막 성장을 하는 존재이며 죽음에 대한 이해를 보다 더 확대하는 계기가 됩니다.
인간과 다를 바 없었던 예수님의 죽음
그러나 가톨릭 신자인 우리는 따로 배우지 않아도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죽음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지켜봐 왔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알다시피 신이기에 앞서 참으로 처절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결코 담대하지 않았습니다. 삼십 대의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에 겁을 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니 동산에 올라 두려움에 떨며 피땀 흘려 기도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그때에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오 26,38). 하느님께 살려달라 매달리기도 합니다. 청원과 타협을 합니다. 그렇지만 두려움 속에서도 온전히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깁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오 26,39).
그리고 결국 십자가를 메고 시련과 고초를 당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극심한 고통과 모욕이 계속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간의 편에서 그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청하십니다. 미얀마의 유명한 명상가이자 수행자인 고엔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참된 성인인가 아닌가를 아는 데는 잣대 하나가 있는데 죽음의 순간에 어떤 마음 상태를 간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해한 인간들에게 복수와 분노 대신 죽음의 순간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럼에도 여전히 한 인간으로서의 두려움과 분노가 드러납니다. 원망하기도 합니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마태오 27,46). 그렇지만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삶의 의미를 놓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 좌절하지 않고 죽음을 통해 소명을 완성합니다. 신으로 거듭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6).
그리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우리에게 죽음이 끝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수용’의 단계가 아닌 ‘희망’의 모습을 우리에게 직접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 좋은 죽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비약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예수님의 수난 과정을 바라보며 그조차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의 아들이었음이 느껴집니다. 죽음 앞에서 부정하고 분노하며 타협하고 좌절하고 슬퍼하는 인간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기에 보다 더 인간적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까지도 용서하며, 스스로의 소명을 완수하고, 죽음 너머 새로운 희망의 단계를 열어주시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죽음이 끝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짐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모습을 매주 마주하며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감히 웰다잉이라는 말이 그 깊은 죽음의 신비를 담을 수 있는 단어일까 조심스럽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죽음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신앙 자체가 곧 웰다잉 교육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종교학자는 ‘종교수행이란 죽음에 대한 반복적 연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그리고 죽음을 맞이할지 연습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 안에서 좋은 죽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