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훈화
사순 5주간-부활 2주간
문재상 안드레아 신부
20250325103725_2096707693.jpg

문재상 안드레아 신부는 대전교구 소속 사제로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을 동반하며 살아가고 있다. 신학생 시절 본당의 청년 쁘레시디움을 통해 레지오를 접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줄곧 레지오 단원들의 열정에 깊이 감동하고 있다.
-----------------------------------------
사순 제5주간(4월 6~12일)
우리 안의 죄악은 은총과 자비의 열쇠

성당을 다니다 보면, 또 레지오를 하다 보면, 참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마음속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곤 하지요. ‘저럴 거면 대체 성당을 왜 다녀?’, ‘레지오를 한다는 사람이 대체 왜 저래?’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차라리 성당에 나오지 않거나 레지오를 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겠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 그러한 태도는 예수님께서 자주 꾸짖곤 하셨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는 ‘분리시키다’라는 뜻을 지닌 ‘파라쉬(פָּרָשׁ‎)’에서 유래한 말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스스로를 ‘율법을 모른 채로 살아가는 대중과 구별된, 거룩하고 특별한 집단’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 역시 ‘나는 저 정도로 나쁘지는 않아.’라고 생각하며, 타인을 단죄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마치 내 안에는 어떠한 잘못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죄와 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참으로 이율배반적입니다. 우리는 대개 악을 마주했을 때, 그 악을 철저히 부정하며 그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보면, 우리가 부정하고 싶은 그 악은 ‘우리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죄악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은총과 자비의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실 때(요한 8,1-11), 그분께서는 그 여인이 무죄하다고 선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은 이들 가운데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라는 성경의 진술은, ‘자신의 죄를 똑바로 바라보는 사람이 타인의 죄 앞에서 무자비할 수 없다.’라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의 죄를 바라보는 일은, 하느님 앞에서 나 역시 끊임없이 용서를 청해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되고, 타인의 잘못 앞에서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됩니다. 타인에 대한 손쉬운 단죄는, ‘나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만 감히 행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닐까 싶습니다.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성주간 (4월 13일~19일)
상명하복(上命下服)

‘상명하복(上命下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대나 조직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로, 윗사람이 명령하면 아랫사람은 이에 복종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상명하복이라는 말이 언제나 좋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상명하복의 문화가 자유로운 토론을 막기도 하고, 아랫사람의 합리적인 의견 제시를 가로막는 장해물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윗사람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요구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누군가 두려움 때문에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 병사는 좋은 군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라는 이름은 이미 우리가 ‘성모님의 군단’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 속 어둠의 세력과 벌이는 하느님의 거룩한 전쟁에서, 총사령관이신 성모님의 지휘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군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나뚜스, 레지아, 꼬미씨움, 꾸리아, 쁘레시디움 단장의 판단과 명령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이는 단원들을 향한 일방적인 요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단원에 대한 순명의 요구인 동시에, 단장에게 ‘총사령관이신 성모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에 일치할 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군인이 된다는 것은 나의 판단과 결정이 아닌, 상급자의 판단과 결정, 명령을 존중하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으셨지만,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신뢰하셨기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기꺼이 마시기를 원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아버지께 대한 신뢰로 인해, 죽음을 향해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고 의연합니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일치시키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우리 역시 그러한 성모님의 군단이 되어야겠습니다. 
세상의 상명하복은, 상관의 판단이 틀릴 수 있기에 항상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틀릴 수는 없기에, 우리는 한 점 의혹도 없이 전적으로 그분의 뜻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습니다. 
--------------------------------------------
주님 부활 대축일(4월 20~26일)
죽음의 여정 안에 내포된 부활의 희망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기반으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라는 사실을 풀어내며,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 죽음을 초래한다고 말합니다. 책에서 나오는 일화로, 수용소의 한 수감자가 꿈속에서 자신이 풀려날 날짜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날에 대한 희망으로 온갖 고난을 견뎌냈던 수감자였지만, 그날이 되어도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음 날 곧바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발진티푸스였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실이 신체적 면역력을 떨어뜨린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즉,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 내 삶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우리의 삶은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고꾸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소설가가 말한 것처럼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사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충만할 수 있을 때, 그 어떤 고통스러운 행위도 충만한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잔을 집어 드실 때, 그분께서는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가 결국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음의 길을 걸어가실 때, 그 죽음의 여정 안에는 이미 ‘부활과 승천에 대한 희망’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정도로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으셨던 고난의 길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죽음 가운데 피어나는 생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남들보다 조금은 피곤하고 힘든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고 속에 하느님의 뜻이 숨어 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안에 담긴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고통이 아닌 기쁨과 희망으로 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을 간직한 삶은, 고통이 아닌 축복입니다.
---------------------------------------------
부활 제2주간 (4월 27일~5월 3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 돼야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볼 수가 없으니 도무지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몇몇 신자들이 부럽다며, 자신은 그런 체험이 없으니 부활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노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과연 초대 교회 신자들이 좋은 것일까요? 
아직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조차 생겨나기 전, 초대 교회는 유대교의 한 분파이자,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불순분자 무리로 세간에 인식되곤 했습니다. 신자들은 주류 사회에서 멀찍이 떨어진 소수에 불과했고, 다른 이들의 멸시와 조롱을 견뎌야 했습니다. 교회 제도도 정비되지 않았고, 교리도 명확하지 않았고, 정확히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도 아직 확실치 않았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 세계 10억 명이 넘는 신자로 이루어진 교회가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면 무시하는 사람보다는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교회 제도도, 교회법도, 교리도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20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여온 신앙의 역사가, 수많은 성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볼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 교회 신자들의 삶을 통해 전해진 신앙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닫힌 문을 통해 제자들 가운데로 들어가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당신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심을 확증해 보이시고,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전하기 위해 온전히 투신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된 제자들의 공동체가 바로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 부활의 증인이고, 그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우리 역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이 세상에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사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 뵙기를 여전히 갈망하고 있다면, 아직 우리의 노력이 충분치 못한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