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묵상하는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사순과 부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라는 복음 말씀에 머물러 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하신 후, 그들에게 묻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 당신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지요. 말하자면 당신께서 병을 고치는 것을 넘어, 죽었던 사람에게 생명을 주어 희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아는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확신을 갖고 그분이 그리스도(구원자)라고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썩은 냄새가 풀풀 나는 시체를 살아나게 하는 것을 보았는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곧 우리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결합될 때, 고통과 죽음이 영원한 것으로 바뀌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천적 의미로 죽음과 부활 신앙은 실생활에서 체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과 같은 비참한 상황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 모든 불행, 그런 것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인간의 처지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가장 큰 목적은 죽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하시는 당신의 의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의지로 부활의 기적을 행하시려고 떠나시는 예수님의 눈에는 무덤 속 라자로의 시체가 살아있는 존재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청소년 시절 저 자신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움 속에만 머물렀습니다.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던 마음의 눈, 편협한 판단, 선입견이 가득한 사고방식이 저를 일 년 동안 방황 속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바라보아야만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죽게 되었는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계시렵니까?”라며 탄식할 대상이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성사 이후 저는 인간의 죽음을 생명으로 전환하시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교리를 듣고 죽음에 대한 관념이 바뀌었습니다. 실제로 저 자신을 바라볼수록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을 가지고 살다가 결국 죽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압니다. 또한 이것이 하느님 섭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기에 인간에 대한 그분의 뜻은 ‘인간은 당신의 생명을 받아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죽은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며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의 신앙고백 필요해
사실 마르타도 ‘모든 것이 끝난 지금이라도 하느님께 구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는다’ 하면서도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현실적으로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가끔씩 앵무새가 뜻도 모르고 사람의 말을 잘 흉내 내는 것처럼, 부활의 생활 체험 없이 일방적인 부활을 다만 교리상으로 몽롱하게 믿는 저의 모습과도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순시기를 보내며 예수님은 당신께서 생명과 부활의 주인이심을 믿게 하시려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라고 마르타에게 물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신앙고백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에 관한 진리의 말씀은 레지오 단원의 행동으로 받아들여져 선교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구원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입니다. 참으로 레지오 단원에게는 죽음과 부활에 대한 깊은 믿음의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