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나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같이 살고 있다(1)
고정수 프란치스코(조각가) 수원교구 퇴촌성당

1998년 일이다.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예술의 전당’에서 “한국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주제로 ‘마니프 서울국제아트페어’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하고자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화 등 각계각층의 대표적인 인물 25명을 선정하여 이들을 테마로 작품을 제작한 기획전이었다. 
주최 측은 설문 조사를 통해 25명의 인물을 선정했는데, 이분들은 한국의 표상이 될 만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적 위상을 지닌, 자타가 공인할 만한 분들이었다. 미술작품이라는 조형의 장을 거쳐 한 단계 더 높게 승화된 ‘현대 한국 인물사’라 할 수 있는 전시회였다. 그런 영광스러운 역사의 장에 내가 발탁되어 매우 영광스럽기도 했지만 무거운 사명감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 주최 측으로부터 대통령의 모습을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지만, 아내는 내게 그보다는 당신이 천주교 신자니까 김수환 추기경님의 모습을 제작하는 것이 더 의의가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기왕에 만들려면 평소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의 모습을 제작하는 것이 더 의미 있고, 열정적으로 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사숙고 끝에 추기경님으로 마음을 결정하고 주최 측에 건의했는데 받아들여졌다.

고심 끝에 기도하는 추기경님의 모습인 반신상 제작
그러나 당시 추기경님께서 서울대교구장 직책을 마치시고 미국에 머무르고 계셨기에 일이 좀 난감해졌다. 국내에 계시면 찾아뵙고 전후좌우 모습을 사진 촬영하여 제작에 참고할 수 있었겠지만 20250218134548_1866677688.jpg부재중이셨기 때문이다. 궁리 끝에 평화신문사에 가서 김 추기경님 인터뷰 사진 100여 장을 빌려 스크랩을 해놓고 작품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진이 정면 모습이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고, 오랫동안 추기경님을 모셨던 운전 기사님과 수녀님들에게 협조를 구하고서야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당시 그분들이 여러 차례 오셔서 고증해 주시지 않았으면 제작에 상당한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추기경님 이마에 흉터가 있으시다는 얘기를 듣고 과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흉터는 1970년부터 불면증에 시달리셨을 때 한 지인이 뜸을 뜨다가 양미간 위에 흉터를 남겼다고 한다.
추기경님의 모습을 제작할 당시를 회고해 보면, 제작에 임하기에 앞서 가장 큰 고민은 어떤 모습으로 제작해야 자연스러울까 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외모를 닮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다움이 서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심한 끝에 기도하는 추기경님의 모습이 사제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는 결론을 내리고 여러 가지 스케치도 하면서 작품구상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주최 측에서는 두상을 제작하라고 했는데, 양쪽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만들려면 팔까지 포함되어야 하기에 두상보다는 규모가 더 큰 반신상으로 제작해야 했고, 이 사실을 주최 측에 전달했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두상인데 유별나게 내 작품만 반신상으로 크게 하겠다고 하니, 주최 측에선 제작비용이 훨씬 더 드는 반신상을 제작하는 것에 의아해하면서도 내 의사를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주님이 인도하신 것이었다.

추기경님의 생애를 충분히 고찰하며 표현하기 위해 힘써
그 후 3개월 동안 난 매일 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작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추기경님의 기도하는 모습이 감상자들에게 별 무리 없이 감정이입이 되고, 경건한 느낌이 들도록 하려면 제작자인 나 자신이 우선 추기경님과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로댕이 발자크 상을 제작하기에 앞서 발자크가 살았던 삶의 경로를 따라 여행했듯이 나 역시 김20250218134548_742814744.jpg 추기경님의 삶을 추적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되었기에 추기경님의 글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묵상에 잠기기도 하였다. 
불특정 다수 인이 알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선 그의 생애를 충분히 고찰하고 감동한 이후에 창작의 에너지가 한없이 솟구치는 것이 자명한 이치가 아닌가!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고 가장 그 사람다운 이미지를 발췌하여 최선을 다해 나타내야만 감상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나는 우선 김수환 추기경님이 평소 즐겨 사용하신 안경, 시계, 묵주반지 등도 사실 그대로 표현하도록 노력했으며 추기경님께서는 남달리 얼굴의 인중이 긴 편이기 때문에 외모의 특징을 살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관건은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는 쉽지 않았다. 모델이 없이 조그만 평면 사진들만을 가지고 커다란 조각상을 만든다는 데 한계가 있었지만,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항상 내 앞에 추기경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면서 작품을 제작했다. 이른바 시쳇말로 신들린 듯이 ‘올인’ 했다고나 할까! 
수없이 점토를 붙이고 깎는 점토 과정 그리고 석고 과정, 주물 과정을 거쳐 마침내 완성된 후 ‘예술의전당’에 전시가 되었을 때 난 초조했다. 작가란 자기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될 때 마음이 조마조마한 법이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는 기분이 드는데, 그때만큼은 제작 과정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에 결과는 어떤 평가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혼자 운반할 수 있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내 작품은 훨씬 크고 무거워 무려 다섯 명이 들어야 운반할 수 있었다. 조각 재료가 브론즈였고 받침대도 통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조금도 힘이 들지 않았다. 사실 나는 원형 제작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추기경님께 선물로 드리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터여서 어중간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돌이켜 보면 어언 26년 전 일이었지만 난 최선을 다해 제작하였기에 보람이 있었다. 그건 돈벌이의 수단이 아닌 진심으로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흠모의 대상을 창작한다는 희열로 충만했기 때문이리라.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