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을까?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을까?” 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을 시작하며 했던 질문이라고 합니다. 이 소설은 1980년 5월의 광주를 이야기합니다. 군인들이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학살하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고통과 상처를 입은 인물들의 내면을 ‘소년’이라는 상징적인 인물로 표현합니다. 작가는 자료를 준비하고 소설을 집필하면서 두 개의 질문을 뒤집어서 바라봅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실제로 그 질문이 현실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12월 어느 늦은 밤,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일을 겪었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영화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에 들어가고 있고, 사람들은 도시 한복판에서 장갑차를 막아서고, 군인들의 총부리가 시민을 겨누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지금의 일인지 의심했습니다. 이 현실은 누군가에게는 온몸으로 그 모든 것들을 체험했던 두려움의 기억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게 했던 아픔의 기억이었을 것이고, 또 다른 어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명령과 강압에 의해 사람을 해하고 억압하는 죄의식의 기억으로 떠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우리 모두를 각자의 자리에서 도망치고 방관자로서 있지 않게 하였습니다. 국회의원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누구보다도 빨리 국회로 달려갔고, 사람들은 그 국회에 군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자기 온몸을 다해 막아섰습니다. 사람들은 멀리서 밤을 새워가며 그 모든 일을 지켜봤고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면 광장에 모였습니다. 또한 군인들은 부당하고 무서운 명령에도 망설이고 주저했습니다. 군인 아들을 둔 어떤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당부합니다. “너 자신의 목숨을 챙기라.”고 그리고 “부대 병사들의 목숨을 지키라.”라고 또한 “절대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말라.”고 힘을 주어 말합니다.
그렇게 45년 전에 무참히 희생되셨던 분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살리고 있었던 겁니다. 과거의 비참하고 참혹했던 사건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도와 살리고 있었습니다.
희망하기 위해 기억하십시오
희망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중에는 ‘티그바’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본래 ‘줄’, ‘밧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예리코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냈을 때 라합이라는 창녀가 이들을 자기 집에 숨겨 주고는 추격대를 따돌리고, 그들을 창문에서 밧줄을 내려 구해주었습니다. 이들은 라합의 집에 분홍줄로 표시를 달아 나중에 도시를 점령할 때 그녀를 해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여호 2,18.21).
그렇게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끈”으로 연결해 줍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곤경과 역경 속에서도 과거의 일들을 기억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찾고 그때의 교훈을 찾게 됩니다. 또한 그 사건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해방시켜 주신다는 확신의 끈으로 연결해 줍니다. 그렇게 하느님에 대한 기억, 헤어나 올 수 없는 수렁에서도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는 이끌어내시고 구원해 주셨는지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의 이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하고 길을 찾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칙서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그것이 믿음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순례하는 교회의 삶 안에 항구히 현존하심으로써 희망의 빛으로 믿는 모든 이를 밝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우리 삶을 지탱하고 활력을 주는 그 희망의 불이 타오르도록 지켜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속이지도 실망시키지도 않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39). 여기에서 우리는, 이 희망이 시련 가운데에서도 꺾이지 않는 이유를 봅니다. 곧, 믿음에 토대를 두고 애덕으로 길러지는 희망은 우리가 삶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3항>
성모님께서도 그 기억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현실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거나 놀랍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합니다’(루카 2,19.51).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해 주셨는지, 그리고 그 사건이 지금을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와 사랑으로 다가왔는지를 기억하셨습니다. 그 기억을 통해 아들이 죽어가는 그 십자가의 밑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시며 희망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기억을 통하여 희망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그 뜻을 실행하기 위하여 인내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희망하기 위해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과거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믿고 오늘을 행동하시고 살아가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기억은 우리를 희망으로, 사랑으로 이끌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