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무관심해’ 또는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네’라고 불평만 하고 있다면 변화를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해 겨울 어이없는 계엄령이 선포되었지요. 국회 앞을 밤새워 지켜준 시민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함께하고픈 마음에 다음 날부터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하는 집회에 나갔습니다.
두 번째 날 자유발언 시간에 자매님 한 분은 사회자가 어디에서 오신 누구냐고 물었을 때 “천주교인입니다.”라고 신원을 밝히고 ‘아무것도 너를’을 노래하셨습니다. 착잡하고 격앙되었던 집회 분위기가 숙연해지면서 그 거룩함은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천주교인이든지 아니든지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전율을 느끼며 뜨거운 것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크건 작건 선구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을 통해 우리는 감동하고, 변화의 씨앗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예언직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알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2~3초에 한 번씩 생명과 활력의 원천인 공기를 들여 마십니다. 대부분은 의식하지 않지만, 의식할 때면 호흡에 섞여 몸으로 들어오는 깃털 같은 생명을 느끼며 우리 존재를 지탱하는 원천을 맛봅니다.
속 깊은 만남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합의와 상호존중의 체험은 바뀔 것 같지 않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날마다의 충실과 헌신이 우리의 삶을 축복합니다.
더러는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군중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이 가리어집니다. 이들의 이름을 소중히 한 분 한 분 부를 때 그들은 꼿꼿이 일어나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와 구체적인 관계가 됩니다. 부서지고 상처 난 존재의 새로운 인식은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하며, 회복할 힘을 줍니다. 인식과 회심 사이의 커다란 간극 그리고, 회심과 행동 사이의 틈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쏟고 있을까요?
공동선의 길이라면 예수와 함께 가는 길을 가야할 것
매일의 삶을 점검하고 성찰을 통해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그 사람의 생명력을 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모님은 믿음과 희망에 기반하여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사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앞이 안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신 공동선의 길이라면 예수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와 함께 가는 길을 고유하게 가야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움직이고 차분하게 하루하루는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게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담담해지고 힘껏 끌어당기는 큰 용기와 사랑을 살게 합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주님께로 초대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