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터전-첫 순교자들의 전주 발자취
첫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터
이진주 마리안나 전주 R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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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전동성당(주임신부 김성봉 프레드릭)은 1791년 12월 8일 순교한 한국 최초 순교 복자 윤지충 바오로, 복자 권상연 야고보 순교 233주년을 기념하여 ‘이영춘 신부님(호남교회사연구소장)과 함께하는 도보순례’를 2024년 12월 7일 실시했다. 순례는 ‘첫 순교자들의 전주 발자취’를 따라 중진영, 전라감영, 전주옥, 전동성당으로 이어졌다.

중진영(中鎭營)20250123145114_1021494511.jpg
진산사건으로 체포된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10월 29일 전라감영으로 압송되던 중 진산을 출발해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금당리를 거쳐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신거랭이에서 처음 쉬며 아침을 먹었다. 완주군 고산면 어우리를 거쳐 완주군 용진읍 용흥리에서 말을 먹였다. 해 질 무렵 안덕원(전주 인후공원 동편) 전주성 동문을 거쳐 중진영(전주 성심여중고교에서 천변 쪽 강암서예관)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성 밖과 남천교 사이에 중진영이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이 근방으로 추측한다.

전주 옥터(전주시 완산구 현무 2길 42 앞)
전주 옥터는 윤지충과 권상현이 참수, 치명하기 전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또한 복자 유중철과 유문석, 이봉금의 교수형이 집행된 곳이고, 복자 이경언과 김조이, 심조이는 형벌로 인한 질병으로 옥사한 곳이다.
1829년 정해박해 때는 24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감금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옥사한 12명 중에는 한국 교회사에서 최연소 순교자로, 12세 소녀의 몸으로 하느님을 증언한 복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가 있다. 그는 어머니가 옥중에서 먼저 순교해 의지할 데가 없었지만 끝까지 신앙을 증거했다. 이봉금은 “7살 때까지는 글도 모르고 하느님도 몰랐지만 그 뒤로는 글도 배우고 하느님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있는 이상 어떻게 배반한다는 것입니까”라며 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천주교 신자들은 옥에 잡혀 오더라도 마음만은 하느님께로 제일 가까이 가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전라감영(전주시 완산구 전라감영로 85)
20250123145114_28636134.jpg전라감영은 전라도를 총괄하는 지방통치 관서로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전주에 자리했다. 조선시대의 전라도는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전라남도, 제주도까지 포함한 지역이다. 감영이란 감사가 근무하는 관아라는 뜻으로 완영이라고도 불렀다. 전주의 옛 이름 완산에서 나온 말이다. 
관찰사가 근무하는 선화당 앞마당에서 1791년 신해박해 때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문을 당하고 고초를 받았지만 천주교 신앙을 증거했다.
그 후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유항검, 윤지헌 등과 1827년 정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전라감영에서 수많은 천주교인이 신문을 받았고 신앙을 증거했다.

전동성당(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1)20250123145113_425458901.jpg
전동성당은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복자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이 1791년 12월 8일 오후 3시에 참수되어 순교한 곳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터이다. 성직자도 없는 상황에서 한국천주교회 역사가 되었다. 
음력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윤지충과 권상연의 처형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싸전다리 시장, 전주 남문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윤지충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했다. 윤지충의 나이는 33세, 권상연은 41세였다. 이들의 머리는 장대 끝에 높이 매달려 9일 동안 효시 되었다. 이후 장례가 허락되어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시체가 상하지도 않고, 선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이 놀라운 상황을 목격한 외교인들은 많이 놀라고 감탄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입교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1801년 10월 24일에는 호남의 사도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동생 유관검,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능지처참 형으로 순교했다. 김유산 토마스와 이우집도 참수로 순교했다. 전동성당은 수많은 순교자가 희생된 한국 천주교 역사의 성지이다.
1908년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가 성전 건립을 시작해, 성전의 설계는 서울 명동성당을 건축한 경험이 있는 프와넬 신부가 했다. 성전의 주춧돌로는 전주성의 성벽 돌이 사용되었는데, 일부 돌은 참수된 순교자들의 피가 스며든 돌인 것으로 추정된다. 성전은 비잔틴풍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호남지방 최초의 서양식건물로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었다.

전동성당 평면도
20250123145113_1004534120.jpg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관련 발현은 프랑스에서 많이 일어났으며, 보두네 신부 소속 파리외방선교사들의 성모 신심은 매우 돈독했다. 박해의 여운이 남았던 시기, 어려움 속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은 선교지 조선을 성모님께 봉헌하면서 선교에 임하였다.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하여 당시 여러 성당이 무염시태 성모님께 봉헌되었고, 더 나아가 전동성당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당 건물 전부가 성모 마리아를 본뜬 형상으로 지어졌다. 감실과 제대는 성모 성심을 중심으로 자리 잡았고, 신자석 기둥은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12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신앙과 건축이 결합한 예술작품이다.

순교자들처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며 가장 소중하고 영원한 분이심을 믿고, 신앙을 위해 거룩한 피를 흘린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순교를 묵상하며 순례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