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
그리스도인 행복의 길
조한규 베네딕토 신부 가톨릭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세계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첫 문장으로 손꼽히는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의 시작입니다. 이 대목은 해석에 따라 다양한 함의가 있지만, 제 생각엔 행복하기 위해 우리가 지닌 조건들이 모두 평균값 이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건강, 재산, 현재와 미래, 가족과 자신이 맡은 일 등의 조건들이 모두 평균 이상일 때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는 말 같습니다. 
반대로 거의 모든 것을 갖췄지만 단 한 가지라도 결정적 문제가 있다면 인간은 행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풍요로울지라도 갖지 못한 한 가지가 큰 고통을 준다”(괴테, 「파우스트」 제2부 5막).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고통을 느끼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다른 무언가를 갈구하게 됩니다.
삶은 행복하기도, 유지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삶은 고해(苦海)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거나 만만하지 않음을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인생에서 고통을 줄이고, 행복 가득한 삶은 가능할까요? 
‘석복’(惜福), 이 단어는 ‘복을 아낀다’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깨달아서, 절제하고 검박하게 삶으로써 일상의 행복을 발견하고 누리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일상의 신비 안에 하느님 은총이 가득함을 깨닫고, 이 신비를 향유할 수 있다는 그리스도교 가르침과 상통합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잘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을 잘 보고, 잘 듣고, 잘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빛은 여전히 빛나는데, 신비롭게도 어둠도 여전히 짙습니다. 인간 삶 안에는 매일 낮과 밤, 빛과 어둠이 공존합니다. 
행복을 밝게 보여주는 빛, 즉 ‘말씀’(Verbum)이라는 빛은 침묵 중에 고요해야만 들을 수 있고,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주변이 어두워야 더 잘 보입니다.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미사 드리면, 세상은 너무나 평온하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꽃이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을 알지만, 자주 인내하고 포기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 삶은 때로 버겁습니다. 석복, 즉 고달픈 일상과 현실에서 우리 각자 의미를 찾고 발견한다면, 행복(行福)을 통해 행복(幸福)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의미를 끄집어내고, 거기서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살아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날 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우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시편 89,10 공동번역). ‘날 수 셀 줄 알아야’ 인간은 지혜와 슬기를 얻는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날 수 센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젊고 힘 있고 즐거울 때 사람들은 하느님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별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날과 앞으로 남은 날을 헤아린다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나에게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삶은 앞으로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뒤쪽으로 가는 것이고, 보통은 이를 죽음 앞에서 깨닫게 됩니다. 누구나 생로병사를 겪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죽음이 가까우면 인간은 철이 들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지고,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삶의 목적은 결국 죽음입니다. 결국엔 다 죽기 마련입니다. 동시에 죽음의 의미는 삶입니다. 삶 없이는 죽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날 수 셀 줄 아는 것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는 것입니다. 날 수 셀 줄 아는 사람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기쁘고 성실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작고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않고, 작은 손해에 맘 상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 하느님이 누구신지 깨달을 수 있기에, 지금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삶의 길은 가깝고도 멀게 느껴집니다. 어떤 때에 행복하다고 느끼는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두 가지 행복한 상황이 있습니다. 첫째, 거의 모든 사람은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을 먹을 때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분위기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둘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할 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한다면, 우리 역시 눈물 나게 행복할 것입니다. 자식을 둔 부모님은 쉽게 공감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도 그러시지 않을까요?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게 산다면, 우리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웃으면서 하느님께 기도하며 희망한다면, 하느님께서 행복해하시지 않을까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탁하여 얻는 평화가 참된 평화
이탈리아 아씨시의 산타 마리아 성당 광장에는 ‘Pax et Bonum’(평화와 행복)이라 적혀 있습니다. 아마도 평화와 행복은 함께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평화를 통한 행복, 행복을 통한 평화! 행복을 가져다주는 평화란 무엇일까요? Pax, pace, peace,... 이 단어의 라틴어 동사형은 pacificare 입니다. ‘pacificare’의 대표적인 뜻은 ‘평정하다’입니다. 즉, Pax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평화란 본래 남을 정복해서, 상대방을 굴복시켜 얻는 것입니다. Pax Romana, Pax Americana 등의 예처럼 힘에 의한 평화가 바로 Pax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평화(Pax)란 절대자에게, 즉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 순종하여 얻는 평화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탁하여 얻는 평화가 참된 평화입니다. 믿는 이에게 행복의 길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진리이신 예수님께 순응하는 것이 평화의 지름길이고, 행복한 삶의 과정이고 핵심이며 결론입니다. 
Dona nobis pacem!(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