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이 시작되었나 싶은데, 어느새 2월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 ‘어떻게 살면 좋을까?’를 고민하는데, 예전에 들었던 말 중에 ‘덤벙덤벙 살아보자’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경치가 좋은 곳에는 항상 누각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누각이라도 누각을 세울 때는 기초를 잘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각을 세우다 보면 단단한 바위가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어서 땅을 평평하게 고르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드러나는데요, 바위의 높이를 맞추느라 힘들이기보다 바위의 높이에 맞춰 나무 기둥 길이를 다르게 잘라서 누각의 수평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지 보니 어떤 기둥은 길이가 길고 어떤 것은 바위 때문에 길이가 짧습니다. 이것을 ‘덤벙 주초’라 합니다.
이 글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내 얼굴을 본 할머니가 물으셨다. “얼굴이 왜 그렇게 어둡냐?” 할머니는 한쪽 눈이 좋지 않으셨고, 목소리를 통해 사람을 분간하실 정도로 다른 쪽 시력도 안 좋은 상태였다. 그런 할머니의 눈에 손자의 힘든 얼굴이 비친 모양이다. “너무 걱정 마라. 때가 되면 다 잘 풀릴 거야, 세상은 덤벙덤벙 사는 거란다.”
어떤 위로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지치고 힘든 나였다. 하지만 덤벙덤벙 살라는 말은 꽤 인상적으로 마음에 꽂혔다. 물론 그게 어떤 삶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몇 년이 흘렀다. 책을 읽다가 우연히 ‘덤벙 주초’란 것을 알았다. 강원도 삼척에 ‘죽서루’라는 누각이 있다. 특이한 것은 누각의 기둥이다. 터를 반반하게 고르는 대신 터에 맞게 기둥의 길이를 달리한 것이다. 길이가 다른 17개의 기둥이 만들어졌다. 숏다리도 있고 롱다리도 있다. 초석을 덤벙덤벙 놓았다 해서 ‘덤벙 주초’라 불린다. 순간 할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세상은 덤벙덤벙 사는 거야.”
터를 반반하게 고르는 대신 터에 맞게 기둥의 길이를 달리 놓을 줄 아는 여유가 놀랍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말뜻을 이렇게 풀 수도 있겠다. 세상은 평탄하지 않다. 반반하게 고르려고만 하지 마라. 덤벙 주초처럼 그때그때 너의 기둥을 똑바로 세우면 그만이다.
그렇다. 세상은 언제나 흔들거린다. 흔들거리는 세상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마음의 기둥을 잘 세워야 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박윤수, ‘불혹, 동화에 혹하다’ 중에서>
살다 보면 어려울 때도 있고 쉬울 때도 있습니다. 내 마음같이 모든 것이 평탄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렵고 힘들 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덤벙 주초’를 놓으며 살아보면 어떨까 합니다. ‘덤벙덤벙 산다’는 것은 대충 살자는 뜻이 아닙니다. 대충 살면 삶이 비뚤어집니다. 기초를 대충 놓으면 누각이 바로 설 수 없듯이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 믿을 때 흔들리는 세상에서 중심 잡아
어느 누가 나를 찌르고 아프게 합니다. 바위가 하나 올라와 있는 것이죠. 그러면 그를 미워하면서 그 돌을 평탄하게 만들려고 망치로 내려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돌을 인정하고 감싸안으며 그 위에 기둥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일이 잘되지 않을 때, 신세타령, 세상 타령 하기보다 평탄하지 않은 그 위에 마음 기둥의 길이를 달리 놓아 내 삶을 바로 세워도 좋을 듯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내 위주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하여 포기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그 상황을 끌어안고 그에 맞게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 또한 ‘덤벙 주초’를 놓으며 살았던 분이라 생각됩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리 4,11ㄴ-12)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중에 온갖 박해와 죽을 고비와 배고픔과 어려움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중간에 포기할 만도 한데 바오로는 끝까지 달렸고, 그런 상황에서 이 말을 하였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안다.’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느님이 나를 보호하고 도와주신다는 그 믿음이 있을 때,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바로잡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돌풍이 일어 배에 물이 들이쳤을 때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는데, 예수님은 뱃고물에서 곤히 주무셨습니다. 두려움과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님이 편히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손길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평탄하지 않고 흔들리는 세상에서 여유를 가지고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마음의 기둥을 잘 세워야 하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를 믿을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레지오를 하시면서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잘 키워나가고, 그 믿음이 오늘의 나를 똑바로 세우는 이유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