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 단원들은 한시도 묵주를 놓지 않고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묵주기도를 합니다. 버스나 전철 안에서 묵주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기도는 사람이 숨을 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목적은 주님이 나와 함께 현존한다는 것을 신심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 명동성당 지하성당 입구에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라는 작은 팻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팻말 앞에 우뚝 서서 바라다보았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일도 없었는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문으로 들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주님께 열정적으로 기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묵상이나 관상기도를 할 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채 빛 같은 것이 보이고 마음속에서는 이런 말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내 아들아, 여기까지 잘 왔다”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난 그 말씀으로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가끔 그 한마디를 해서 위로를 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동료 신부가 힘들게 사제 생활을 했습니다. 신학교 때부터 성격이 세서 화를 잘 내고, 분함을 참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신학교 동료와도 마찰이 있었고, 사제가 된 후 크고 작은 일로 자신과 신자들에게 서로 상처 주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는 한때 사제직을 떠날 생각도 했습니다. 그 굴곡의 세월을 견디고 머리엔 하얀 서리가 내린 듯 시간이 흘렀습니다. 언젠가 동창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의 이야기엔 사목자로서의 후회와 성찰이 들어있었습니다.
옆에 앉은 나는 그 동창 신부의 이야기를 듣다가 오른손으로 그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습니다. 동창신 부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그래도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잘 왔잖아, 사제도 사람인데 완벽할 수는 없잖아, 부족한 부분은 그분이 채워주실 거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잠시 후 그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는 손수건을 그에게 건넸고 그 친구는 한참 동안이나 눈물을 닦아냈습니다. 그리고 내게 손수건을 다시 건네며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내가 “울다가 웃으면 안되는데...” 하자 우리 둘은 크게 웃었습니다. 그 친구가 “영엽이는 신학교 때도 아주 심각한 순간 유머를 해서 분위기를 바꾸는 재주가 있어” 하며 평정을 되찾은 듯했습니다. 그 동창신부는 나중에 나의 이 한마디가 큰 의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사람이 숨을 쉬는 것과도 같아
예전에 성소국이 생기기 전, 신학생들을 익명으로 도와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매달 가난한 신학생들에게 용돈을 나누어주는 분들이었습니다. 모임이나 개인이 희사를 해도 누가 도움을 주는지 전혀 알지 못하게 중간책(?)이 돈을 받아와 신학생들에게 비밀리에 나누어주었습니다. 기부자가 누구인지, 어떤 신학생이 받는지, 서로 모르는 비밀 점조직이었습니다. 신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부담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습니다.
내가 대학원 1학년 때 두 군데 모임에서 신학생들에게 용돈을 주는 총무 역할을 하게 되어서야 이 모든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용돈을 받는 신학생들은 확실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30명쯤 됐습니다. 한 달에 한 번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표분과 잠깐 만나 봉투를 받아 그날 저녁부터 신학생들을 한 명씩 따로 찾아가 용돈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분들이 바라는 것은 착한 사제가 되어주는 것뿐이라고 하셨고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제 때, 사제품을 앞두고 부산에서 초청을 받아 한 가정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댁 부부는 내가 어려운 시절 등록금도 따로 후원해 주신 분이라 특별히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꽤 큰 저택이었는데 오후에 그 집에 들어갔을 때, 아이들은 옹기종기 긴 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6명의 딸부잣집이었습니다. 큰아이는 6학년, 막내는 아직 유치원에 못 가는 나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부제님이 오셨으니 일어나라” 하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안녕하세요”하고 고개를 숙이며 예의있게 인사했습니다. 그리고는 재빨리 깔려있던 이불들을 정리하는데, 큰아이들은 먼저 어린 동생들이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고 바닥을 빗자루로 쓸며 일사불란하게 마루를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6학년, 4학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주방에서 어머니를 돕고 다른 아이들은 고사리손에 행주를 쥐고 슥슥삭삭 식탁을 닦았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자 여느 집처럼 시끌벅적하고 떠드는 와중에도 옆에 앉은 언니가 어린 동생을 먼저 챙기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내가 놀란 것은 저녁 식사 후 8시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거실로 나와 아이들에게 “저녁 기도하자”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와 함께 하나둘씩 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나도 아이들 틈에 끼어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오늘은 둘째가 시작기도를 해보자” 하자 모두 성호를 긋고 저녁기도를 바쳤습니다.
아버지가 “내일 큰언니 생일이니 넷째가 언니를 위해 기도해 주면 좋겠는데.” 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 찡긋 웃더니 넷째가 눈을 감고 합장을 한 채 떠듬떠듬 자유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 우리 큰 언니 ○○가 요새 몸이 안 좋아요. 그런데도 동생들에게 티도 안 내고 우리를 도와주는 것 잘 알고 있어요...” 얼떨결에 함께 앉아있던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그만 눈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지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딸들의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신부님, 막내가 이번에 서울에서 대학 졸업하고 취직했어요, 다른 아이들도 유학도 가고, 학위도 따고 모두들 다 잘 되었어요.” 전화를 끊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30년도 훨씬 더 지났지만 그날 밤 가족 기도의 현장이 생생하다. 난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매일 기도하며 자랐는데 하느님이 얼마나 예뻐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