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여인은 누구실까?”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노우재 미카엘 신부 부산교구 서동성당 주임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실까?” 레지오 단원들이 세상 곳곳에서 날마다 바치는 기도입니다. 까떼나를 함께 바치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뭘까요? 목소리가 점점 우렁차게 커진다는 겁니다. “먼동이 트이듯” 할 때 잔잔하던 목소리가 “달과 같이” 커지고 “해와 같이” 힘을 내다 “군대처럼” 막강해집니다. 
어린 시절 복사단 레지오를 할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린이들이 함께 입을 모아 기도하는데, 처음에는 나지막하게 시작하다가 “저 여인은 누구실까?” 하면, 모두가 상기되어 목소리는 높아지고 얼굴은 붉어져 있었습니다. 한참 뒤 보좌 신부 시절 어린이 쁘레시디움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함께 묵주기도를 드리고 또 까떼나를 바치는데, “저 여인은 누구실까?” 이 대목에 이르면 어린 학생들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큰지 회합실이 떠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달 본당에서 꾸리아 연차 총친목회가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성전에 모여 기도하며 까떼나를 바치는데, 제 기억 속의 어린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우렁찬 목소리로 “저 여인은 누구실까?” 외치는 겁니다.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힘찬 목소리였습니다. 성모님을 사랑하는 레지오 단원들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일까요? 성모님 앞에서 성모님을 바라보며 “저 여인은 누구실까?” 하면 남녀노소 모두가 힘이 납니다.
단원들의 물음에 성모님께서 화답이라도 하시듯, 곧바로 성모님의 찬미가 이어집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이 찬미가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드린 기도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하여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하며 성모님을 찬송했고, 성모님은 이 찬미가를 부르며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렸습니다.

성모님의 믿음과 사랑이 너무나 잘 담긴 ‘네페쉬’
그런데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제가 주님을 찬송합니다.”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하고 기도하셨을까요? 또, 영혼은 무엇이고, 마음은 무엇일까요?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한데, 까떼나를 바칠 때는 기도하는 게 바빠 그냥 넘어가기 쉽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영혼’은 라틴어로 ‘아니마’(anima)이고, ‘찬송하다’는 ‘마니피캇’(magnificat)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에 관심 있는 분들은 성모님의 찬가 “마니피캇 아니마 메아 도미눔”(Magnificat anima mea Dominum)을 잘 아실 겁니다. ‘마니피캇’은 성가로 찬미를 드리는 성가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어서 성가대 이름으로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27년 전 제가 보좌 신부로 지내던 본당도 마니피캇 성가대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성모님께서 왜 ‘영혼’으로 주님을 찬송한다고 하셨을까, 내 몸과 마음으로, 내 생명을 다 바쳐 찬미한다고 하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은 ‘아니마’를 ‘프쉬케’(psyche)라고 하는데, ‘프쉬케’를 그저 심리학 관련 용어로 생각하던 저는 여전히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명확해졌습니다. 성모님은 ‘시온의 딸’로서 유다교의 토양 안에서 성장하셨으니, 성모님의 기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창세기는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라고 전합니다. ‘생명체’는 히브리어로 ‘네페쉬’, 본래 목구멍을 뜻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살아가도록 양식을 마련해 주시고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데, 모두 목구멍(네페쉬)으로 받아들여야 하니 유다인들은 목구멍을 아예 생명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페쉬’는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 생명체이고, 성모님께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며” 하실 때 ‘영혼’이 바로 이 ‘네페쉬’였습니다. 
성모님은 스스로를 ‘네페쉬’라고 고백하며, “저는 주님 때문에 살아있고, 주님 때문에 살아왔고, 주님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당신의 피조물입니다. 당신의 사랑과 은총으로 살아가는 제가 당신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당신만이 저의 모든 것입니다.” 하고 기도하신 겁니다. 성모님의 믿음과 사랑이 ‘네페쉬’에 너무나 잘 담겨 있구나 싶은데, 이것을 그저 ‘영혼’이라고 하니 밋밋한 느낌이 듭니다.

주님을 찬송하는 것은 주님께서 머무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
‘마니피캇’(magnificat)도 좀 더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마니피캇’은 라틴어 ‘마그누스’(magnus, 큰)와 ‘파키오’(facio, 만들다)의 합성어로 본래 ‘크게 하다’는 말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며…”는 “내 영혼이 주님을 크게 하며…”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모님이라 해도 어떻게 주님을 크게 할 수 있을까요? 성모님은 유한한 인간 피조물이고, 주님은 무한하신 창조주 하느님이신데 말입니다. 
우리들 안에 주님을 모시는 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근심 걱정이나 욕심에 찌들어 있으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머무실 자리가 그만큼 줄어듭니다. 세상 재물이나 쾌락에 정신 팔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 내 경험만 앞세우고 주님의 뜻을 찾지 않으면, 글쎄요, 주님께서 과연 얼만큼 내 안에 머무실 수 있을까요? 
주님을 찬송하는 것은 내 안에, 또 우리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마음껏 머무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사랑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응답하며 자기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성모님 안에 머무실 자리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과연 주님께서 성모님 안에 온전히 머무르시니, 성모님은 주님의 거처가 되어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도 강력한 기도입니다.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 앞에서 성모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기도합니다. 성모님께서 함께 기도하시니 단원들이 힘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여인은 누구실까?”, 이 기도는 성모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성모님을 더욱 깊이 알고 싶어 드리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성모님께서 누구이시고 어떤 분이신지 겸손하게 묻는 물음에 답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의 신심도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금년 한 해 성경과 교회 가르침을 따라 성모님의 신비에 조금씩 접근해 보겠습니다. 이번 달에는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네페쉬’라고 고백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주님을 찬송하는 복된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