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1
하느님 몫으로 남겨 둬야
옥현진 시몬 대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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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성모님의 군단인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샬롬!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의 포탄 소리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묵주기도를 통해 평화의 성모님께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작년 2월에 박노해 시인이 쓴 ‘눈물 꽃 소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시인의 소년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묶어 만든 책입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박노해 시인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일감을 맡겼는데 너무 열심히 일을 수행했지만, 칭찬은 고사하고 질책을 듣자 토라졌던 대목이었습니다.

햇살 좋은 어느 날 마당에 멍석을 깔고 수확한 녹두, 팥, 수수 등을 고르게 펼쳐놓고 어머니는 아들 기평에게 일감을 맡겼습니다. “이 장대 들고 새들 좀 봐라. 이따금 곡물을 뒤집어 잘 말리면서” 그러고는 어머니는 바닷가에 김장 배추랑 무를 절이러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곡식을 널어 말린다는 소문을 들은 새들이 모여와 넓은 마당을 오가며 쪼아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평은 긴 대나무 장대를 휘두르며 새들을 쫓아내고 훠이 훠이 소리치며 곡식을 뒤집고, 새똥을 치우며 곡식을 지킵니다. 팔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힘도 빠져가는데 어머님이 오셨습니다. “알곡들 잘도 말렸네. 근디 놀면서 하제 그리도 열심히 쫓아다녔냐. 새들도 좀 묵어야제.” 그 소리에 기평은 갑자기 힘이 쭉 빠지며 은근히 부아가 나서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저녁 밥상에 맛있는 생선을 구워 먹어보라고 해도 기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속상해 일찍 잠자리에 누운 기평에게 어머니는 나직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평아, 오늘 애썼는데 어미 말이 서운했냐. 근디 말이다... 열심이 지나치면 욕심이 된단다. 새들도 묵어야 사니께 곡식은 좀 남겨 두는 거란다. 갯벌에 꼬막도 저수지에 새뱅이도 씨 마를까 남겨 두는 거란다. 머루도 개암도 산짐승들 먹게 남겨 두는 거고, 동네잔치 음식도 길손들 먹고 동냥치도 먹게 남겨 두는 것이란다. 아깝고 좋은 것일수록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기평아, 사람이 말이다. 할 말 다 하고 사는 거 아니란다. 억울함도 분함도 좀 남겨 두는 것이란다. 잘한 일도 선한 일도 다 인정받길 바라면 안 된단다. 하늘이 하실 일도 남겨 두는 것이란다. 하늘은 말없이 다 지켜보고 계시니까.” 
내 등을 다독다독 쓸어주는 엄니의 손길이 따숩기만 해서, 분하고 서운한 마음에 토라졌던 내가 부끄러워서 나는 이불을 당겨쓴 채 눈물을 삼켰다.

교회 내에서 많은 봉사활동으로 솔선수범하고 계시는 전국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 박노해 시인의 ‘눈물 꽃 소년’을 꼭 권하고 싶습니다. 단원 활동을 하면서 마음 상하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단장이나 간부 일을 맡으면서는 그만두고 싶은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이름을 걸고 일한다고 생각해 때론 열심이 지나쳐 욕심이 되었던 적은 없었을까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하는데 남겨 두지 못한 마음과 다른 단원의 협력을 받지 못한 서운한 마음에서 원망하는 마음도 생긴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이 다 보고 알고 계시니 담대하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성모님은 이해되지 않은 순간순간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 억울함도 분함도 남겨 두는 지혜를 청하며, 최선을 다하시는 레지오 단원들과 간부들을 위해 하느님 몫으로 남겨 두는 지혜를 주시라고 성모님께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