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쪽 바다 갯마을에서 태어나 김수환 추기경님과 인연이 깊은 마산 성지여고가 모교입니다.
호수 같은 뱃길을 따라 통통배를 타고 모교에 들어서면 자비로운 성모상이 있습니다. 계절 따라 녹색과 고운 꽃들의 향연이 펼쳐져 철쭉, 목련, 모란, 작약, 옥잠화 등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해 우리들은 모교를 옥잠화 동산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동산 안쪽에 인자하신 추기경님의 사랑(사랑채)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신부님이 거처하시는 곳을 ‘신부님 사랑’이라고 했어요. 아침 전체 조회 시간이면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지혜와 사랑을 심어주셨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
세월이 흘러 저는 출가해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시어머님은 인자하신 성품이었지만 맏종부인 제가 종교만은 당신과 같은 종교를 믿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어머님을 따라 절에 열심히 다녔고, 한때는 불교에 심취해 포교사가 되어 학생회 법회까지도 맡아서 했습니다.
그래도 월간지나 어디에서 추기경님 글을 읽을 때나 추기경님의 발자취라도 볼 때면 괜히 죄인 같고,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선연한 추기경님에 대한 꿈!
2009년 추기경님이 선종하셨을 때 친정 노모께서 저희 집에 와 계셨는데, TV에서는 연일 김수환 추기경님 선종 소식이 나왔습니다. 그걸 보신 어머니께서 “호박이나 고추가 늙어야 인물이 좋은데 저 양반은 인물이 더 근사해졌네. 참 보기 좋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개교기념일에는 빠지지 않고 학교에서 추기경님을 보셨기에 노모께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추기경님의 선종은 나에게 너무나 큰 아픔이고 슬픔이었습니다. 내 몸 세포 하나하나의 수분이 다 눈물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추기경님, 당신의 그 행위나 업적으로 천국에 가시겠지만, 이 한 많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인도 환생하셔서 더 거룩한 지도자가 되어주셔야 합니다. 더 거룩한 지도자가 되어주셔야 합니다. 더 거룩한 지도자가 되어주셔야 합니다. 저의 간절한 기도를 꼭 들어주소서.” 저의 바람은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꿈을 꾸었습니다.
수단을 입으신 모습으로 제가 태어난 방에서 편안히 돌아가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는 “주교님! 주교님! 저는 시어머님 따라 절에 다니는데 저희 집에서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요. 빨리 성당 다니는 신자 집으로 가세요.” 하니 “선아,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갈만한 곳은 다 갔느니라.” 하셨습니다.
눈을 떠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몸이 개운하고 상쾌했습니다. 마음도 가볍고 기분이 맑아졌습니다. 마산 남성동성당에 다니는 사촌 레지나 언니에게 급히 전화했습니다. 상기된 마음으로 꿈 이야기를 하고, 나는 언니에게 “언니, 천주교, 불교, 아주 높은 곳은 다 통하나 봐. 나 이제부터 추기경님께 죄송스럽게 생각 안 할래.”하고 말했습니다.
꿈 이야기를 다 들은 언니는 “나는 성당에 다녀도 그런 꿈을 못 꾸는데 부럽구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천주교 신자는 물론 여러 사람에게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분, 90세가 넘으신 천주교 신자께서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널 부르시겠구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대구 성바울로성당에서 교리를 배우고, 2024년 5월 19일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절에서 같이 도반이었던 친구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라며 울먹입니다. 제 꿈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는…” 하셨던 오직 한 분, 그분 말씀이 생각납니다.
늦게나마 부족한 저를 불러주신 하느님 한없이 감사합니다. 지금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제일 어렵다는 우리 가족에게 행동으로 전도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하느님은 꼭 도와주십니다.
권능과 자비가 다함이 없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세계가 모두 평화롭길 두 손 모읍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