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보르카는 태어날 때부터 깃털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보르카에게 털옷을 짜주지만 오히려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된다. 외톨이가 된 보르카는 급기야 날기와 헤엄치기 등을 배우지 못하고 날이 추워져 기러기들이 따뜻한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 혼자 남겨진다.
외로운 보르카는 비 오는 날 마른 곳을 찾아다니다 우연히 정박한 배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선원들과 함께 여행하게 된다. 그러다 선장은 보르카를 한 공원으로 데려다주는데, 그곳은 일년내내 온갖 기러기들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이상야릇한 새들이 다 모여 있고, 무엇보다 보르카를 비웃는 친구가 없었다. 보르카는 그곳에서 여자 친구도 사귀며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라는 이 책은 영국의 3대 일러스트레이터인 존 버닝햄의 첫 번째 작품으로, 1963년 영국 그림책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상대방을 보며 귓불을 만지는 행위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위로 여겨져 조심해야 한다. 태국에서 아이가 귀엽다고 머리를 만지면 큰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들은 머리에 영혼이 깃들어 있어 머리를 만지면 영혼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특정한 숫자나 동물 등에 대한 금기들이 나라마다 있고, 그 의미도 달라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어떤 집단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만들어 내게 된 생활 양식이 문화이다. 이는 개인적 행동과 개인의 독특한 습관과는 다르다. 그리고 문화는 그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되고 전달되는 것으로, 의식주를 비롯하여 말이나 풍습, 종교, 제도 등 생활의 전반적인 면을 포함하게 된다. 그러니 문화는 그 집단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긴 하나 다른 집단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생활 양식일 수 있다. 이때 새로운 문화를 접한 사람이 느끼는 불안을 ‘문화 충격(culture shock)’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1954년에 인류학자 칼레르보 오베르그가 처음 소개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한 사람이 느끼는 불안이 ‘문화 충격(culture shock)’
문화 충격에 따른 반응은 대체로 네 단계로 구분한다. 처음은 호감으로 다른 문화를 접하며 문화적 차이를 재미와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허니문 단계이다. 주로 여행객이나 단기 체류자들이 느낄 확률이 높다. 그러다 몇 개월이 지나면 낯선 문화에 대한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커지면서 생활이 불편해지는 등 위기나 적대감의 단계가 온다. 이 단계에서는 우울해지기도 하고 향수병을 앓게 되기도 하니 다소 힘든 시기라 할 수 있다. 이후 상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순응하려는 조정 단계가 오는데 이쯤 되면 문화의 차이를 배우고 인정함으로써 그 문화에 점차 익숙해지며 상대 문화와 자신의 문화가 조화롭게 융합된다. 마지막으로 적응 단계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으로 모든 상황에서 문화적 차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그곳의 일원이 되고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로 사고의 폭이 넓어지게 된다.
문화 충격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수용 정도는 다르다. 단계별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고 끝까지 한 단계에 머물거나 특정 단계를 뛰어넘기도 한다. 외국에서 살다가 모국으로 돌아와 느끼는 역문화 충돌도 있으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마다 정도만 다를 뿐 사람들은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생활 터전이 크게 달라지는 이주나 이민뿐만 아니라 유치원 입학을 비롯한 각 단계의 입학과 입대, 이사 등도 스트레스가 없다고 할 수 없다.
학창 시절에 모범생이었던 50대의 K형제는 입대 후 한동안 소위 ‘관심병사’라고 불리며 군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는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찾아야 움직이는 습관 때문에 동작이 조금 굼뜨게 되면서 상사의 지적과 동료의 질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훈련 중에 그의 탁월한 능력을 알아본 작전관에 의해 행정병으로 보직이 이동되면서 천주교 신자인 상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세례도 받고 무사히 제대하게 되었다. 지금 K형제는 쁘레시디움 단장으로 예비자를 잘 돌보는 봉사자로 유명하다. 그는 그 비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비자들은 이제 막 고개 내민 어린 새싹과 같습니다. 여린 싹에 물을 줄 때 흙이 패여 뿌리가 뽑히지 않도록 조심하듯 그들에 대한 돌봄은 세심해야 합니다. 생소한 환경에 처한 그들의 어려운 마음을 헤아리며 함께하다 보면 어느새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지요. 물론 저의 노력에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레지오의 목적이 하느님과 신앙을 모든 영혼들에게 가져다주는 일’(교본 123쪽)인 것은 주님의 마지막 유언인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기에 ‘교회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그리스도교가 현지 문화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지역의 주민을 대상으로 수행하는 선교 활동’(교본 485쪽)은 레지오 단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입교 권면 대상자나 입교자들에 대해서는 좀 더 특별한 이해가 필요하다. 입교 권면 대상자들은 새로운 가치를 소개받고 있고, 입교자들은 실제로 새로운 가치의 환경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들이 이제까지 추구해 온 가치와 다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기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교가 주는 참 기쁨과 새 희망이라는 긍정적 정서뿐만 아니라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하는 다양한 형태의 불안과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이 버거워 아예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그들을 대할 때는 문화적 편견을 조심해야 하고, 그들의 취향 존중을 넘어 그들이 속한 집단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우리가 정체성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라는 노력일 수 있다. 성당에 다니다 보면 저절로 다 알게 된다고 생각하는가? 나도 그랬듯 친숙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적응력은 같지 않고 또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이 권하는 것처럼 ‘우정 어린 마음씨와 예의를 갖춘 바른 행동, 인내와 배려, 그리고 이해,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감싸는 일’인 소위 말하는 ‘작은 덕행’으로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교본 315쪽 참고)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주민들을 조직화한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적인가!’(교본 1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