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훈화
대림 제1주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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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는 2011년 제주교구 사제로 서품받았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로마 성 안셀모 전례대학원에서 수학하고,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봉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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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간(12월 1-7일)
놀라운 교환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강론에서 러시아 작가 레오 톨스토이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어느 사나운 임금이 사제와 현자들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명령했습니다. 현자는 이러한 임금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에서 막 돌아온 양치기가 우연히 사제와 현자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해결해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양치기는 임금 앞에 나가 임금의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양치기는 임금에게 말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리가 옷을 서로 바꾸어 입어야 합니다.” 임금은 주저하면서도 기대하는 답이 너무나 궁금하여 양치기의 말대로 했습니다. 임금은 양치기에게 자신의 왕실 예복을 주고 자신은 가난한 양치기의 남루한 옷을 입었습니다. 옷을 다 바꿔 입자 양치기가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런 일을 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의 성탄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교환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사람이 겪는 모든 일–기쁨과 희망만이 아니라 고통과 피로, 배고픔과 갈증, 절망,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 자체까지 사람이 어쩔 도리 없이 지니고 사는 것들을 받아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당신 자신을 ‘옷’으로 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 때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세례 예식 직후에 새 신자에게 흰옷을 입혀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옷은 그냥 겉으로 걸치는 옷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는 고백에 이를 때까지, 우리 속 깊이 파고들어 우리를 안으로부터 완전히 새롭게 하는 옷입니다. 주님 성탄의 신비는 이 놀라운 교환을 드러내는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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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간(12월 8-14일)
교황님의 겸손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을 연 교황 요한 23세는 이탈리아 북부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땀흘려 일하는 노동으로 삶을 일구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임을 자랑스러워하셨고,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과 나누는 허물없는 대화와 유머를 즐기셨습니다. 그런데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기질상 모든 일에서 절제를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교황님도 성당 안에서는 고요히 머무는 신심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교우들에게 늘 따뜻한 애정을 드러내시면서도, 그와 별개로 겸손한 침묵을 유지해야 할 하느님의 집에서 신자들이 박수를 치거나 환호하는 행위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로마와 남부 이탈리아 신자들의 기질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침묵을 실례로 여겼고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했으며, 자신의 열정과 신심을 큰 소리로 드러냈습니다.
교황 임기 초반의 어느 날,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예식을 주례한 요한 23세는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많은 순례자와 신자 여러분을 만나서 정말 기쁩니다. 앞으로도 계속 방문해 주세요. 하지만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순례는 우리 신앙에 유익해야 합니다. 좀 더 침묵을 지키려고 노력해 주십시오. 특별히 이곳, 그리스도의 사도가 잠들어 있는 곳에서는 침묵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 여러분이 이곳에서 내는 소음 탓에 베드로 사도가 진정 편안히 쉬실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외침 소리는 파도처럼 계속해서 커졌다 잦아들기를 반복했고, 그런 와중에도 교황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강론을 계속했지만, 열광의 물결 때문에 준비해 간 원고의 절반 정도밖에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교황님은 “내가 졌습니다” 하시는 듯 교우들을 향하여 두 손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시편 89장 15절의 말씀을 외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환호를 아는 백성!”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들어 높이는, 진정 아기 예수님을 닮은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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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간(12월 15-21일)
빈 의자의 기다림

근대에 들어서 의자의 사용이 보편적으로 확대되기 전까지, 가르치는 사람은 높은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가르치고, 가르침을 듣는 사람은 ‘일어서서’ 또는 ‘바닥에 앉아서’ 듣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의자에 앉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자주 앉아서 가르치셨습니다. 참행복에 관해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셔서 자리에 앉아 가르치셨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일어서서 성경을 봉독하시고는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님 앞에 서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마태 26,55). 
당대의 다른 스승들과 달리 예수님께는 자리가 주는 특권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자리에 앉는 것 자체에는 의미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초막절 축제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날에는 아예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 또 스승과 제자 사이에 지켜야 할 법도가 엄중했던 시대에 그분은 당신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격식이나 품위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자리에 앉아 가르치시는 그분 발치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들었습니다. 아마도 성부 오른편에 당신의 영원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무한한 신뢰가 예수님께 이 세상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크나큰 자유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최후의 자리를 기억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성당의 모자이크에 ‘빈 의자’를 즐겨 장식했습니다. 그 빈 의자 위에는 성령의 비둘기가 고요히 머물러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의 불안하고 번잡한 마음이 그 의자에 앉으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영원한 쉼을 얻게 될 그날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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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간, 주님 성탄 대축일(12월 22-28일)
살아있는 돌로 지어진 영적 성전

“여러분도 살아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1베드 2,5). 베드로의 이 말은 비유이지만 세례받은 신자와 성전 사이에는 실제로도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성당 봉헌 예식’의 구조에는 이 닮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세례성사에서 후보자들이 물로 세례를 받듯이, 성당 봉헌 예식에서는 제대와 성당 전체에 성수를 뿌립니다. 제대와 성전 건물 전체에 있는 열두 개의 십자 표시에 축성 성유를 발라 하느님께 특별히 봉헌하는 것처럼, 새로 세례받은 이들도 축성 성유를 발라 하느님의 거룩하고 사랑받는 백성으로 봉헌됩니다. 
새 신자가 그리스도의 빛을 받는 표지로 파스카 초에서 당긴 불을 받는 것처럼, 새로 봉헌된 성당은 주교에게서 불을 받아 처음으로 제대 초에 불을 붙이고 성당의 모든 조명을 환하게 밝힙니다. 그런 다음 새 신자는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흰옷을 받아 입는데, 새로 봉헌된 제대에도 흰 제대 천을 덮습니다. 또 세례받은 신자와 봉헌된 제대 모두 분향을 받습니다. 
이 닮음에 기대어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지체로 다시 태어난 새 신자는 살아있는 돌로 지어진 영적 성전으로 봉헌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돌로 따지자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귀한 보석도 아니고, 둥글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돌멩이도 아닙니다. 그런 돌들로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칠고, 튼튼하고, 누군가의 움푹 들어간 어느 부분에 다른 이의 튀어나온 부분이 메워지는 그런 모습의 돌들입니다. 성당 봉헌 예식에서 제대 다음에 축성 성유를 바르는 곳은 바로 이렇게 서로 아귀가 맞아 접합할 수 있는 돌들로 이루어진 튼튼한 성당 벽입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의 지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둥글둥글한 모양으로 홀로 있기보다 서로 맞닿아 아귀가 맞물리도록 망치로 깨어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매끄럽게 홀로 있어 다른 사람과 이어질 틈조차 없게 하기보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며 서로를 받아 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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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2월 29일-1월 4일)
기도의 연료

기도의 연료는 무엇입니까? 기도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도록, 기도의 엔진이 쌩쌩 돌아가도록 만드는 연료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필요’이겠습니다. 기도할 때 사나운 분심이 우리를 길 잃은 미아로 만들고, 무거운 눈꺼풀이 우리를 졸음의 포로가 되게 하고, 차가운 가슴이 우리를 하느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필요한 만큼 다 줄 채비를 차리신 분 앞에서 손을 내밀 필요조차 느끼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한편, 필요한 게 없다는 말은 감사하게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결핍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도무지 감당할 길 없는 고통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덮치면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도합니다. 간절히, 필요한 만큼 다 주실 때까지, 기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하느님께 감사의 말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않게 하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그러나 이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 사람은 하느님과 너무 멀리 떨어져 버리게 된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세상의 필요는 유한하지만, 영원을 향한 필요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필요는 다 채워지면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지만, 성령을 향한 필요는 채워질수록 더 갈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참된 관건은 영원을 향한 이 ‘필요’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성인들에게 가난이, 금욕과 고행이, 끊어버림과 돌아섬이 그렇게도 사랑받았던 까닭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없이 천국에 있기보다 하느님과 더불어 지옥에 있기를 택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이제 됐습니다.” 하고 말하고서는 하느님께 돌아서서 “제 영혼 당신 안에 쉬기까지 잠잠하지 않나이다.” 하고 졸라댔던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이상은 높습니다. 기도의 실천은 늘 자신을 결핍으로 내모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한한 영적 필요는 틀림없이 우리 기도의 좋은 연료가 되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