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다윗의 도주와 요나탄의 우정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 대구대교구

사울의 사위가 된 다윗
사울은 자신의 딸을 미끼로 내어놓고 다윗을 회유하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내 맏딸 ‘메랍’을 아내로 줄 터이니, 오로지 너는 나의 용사가 되어 주님의 전쟁을 치러 다오.”(1사무 18,17) 이렇게 말한 사울이지만 정작 다윗을 사위로 삼으려니 장차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화근이라 생각한 것일까요? 막상 딸을 주기로 한 때가 다가오자 그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그 결혼을 사양했었기는 하지만요. 
그러던 중 사울의 다른 딸 ‘미칼’이 다윗을 사랑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그 딸을 미끼 삼아 다윗을 없애버릴 생각으로 자신의 신하들을 부추겨, 필리스티아인의 포피 백 개만 바치면 사울의 사위가 될 수 있다고 다윗에게 귀띔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용기로 충만한 다윗은 필리스티아인 이백 명의 포피를 바쳐 사울왕의 사위로 충분한 조건을 채웠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다윗을 사위로 삼았지만 하느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시고 자신의 딸마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윗을 더욱 두려워하고 질투하여 자신의 평생 원수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없애버리고자 자신의 딸들마저 미끼로 내어놓은 사울의 못된 마음과 음흉함에 할 말을 잃습니다. 추악한 질투심이 우리 인간의 나약한 이기심을 파고들면 얼마나 깊은 병을 앓게 되는지요! 나 자신은 어떤가요? 내가 지금 누군가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다면, 정작 나의 사악한 마음이 잘못된 것 아닐까, 먼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윗을 감싼 요나탄과 미칼, 그리고 하느님의 보호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겠다고 하자, 다윗을 좋아한 요나탄은 이를 다윗에게 알려주며 조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어찌하여 임금에게 죄를 짓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큰 승리를 안겨준 충성스러운 신하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냐, 또 그렇게 죄를 지으려는 것이냐 따졌습니다. 이에 사울은 다음의 말로 맹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1사무 19,6) 다시 전쟁이 일어나 다윗이 필리스티아인들을 크게 무찌르자 사울은 또다시 질투에 사로잡혔고,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창을 던졌으나 실패한 사울은 전령들을 보내며, 다윗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아침이 되면 그를 죽일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를 알아챈 미칼은 다윗을 도망가게 했는데, 사울이 이를 알고 어찌하여 자신을 속이고 원수를 빼내어 목숨을 건지게 했느냐 물었습니다. 미칼이 사울에게 대답했습니다. “그가 저에게 ‘나를 빼내 주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1사무 19,17) 
그렇게 목숨을 건진 다윗은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갔습니다. 이를 알게 된 사울이 그를 잡으려고 전령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보내는 전령들마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황홀경에 빠져 예언을 하였고, 급기야 뒤따라간 사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 앞에서 황홀경에 빠져 예언을 하였고, 그날 하루 밤낮을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지요. 다윗은 하느님의 보호로 사울의 악한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탄 왕자를 찾아가 사울왕의 악행을 알렸습니다. 그는 요나탄에게 사울의 진심을 떠보도록 한 후 들에 숨어 지냈습니다. 다윗이 자리를 비운 지 두 번째 되는 날, 사울은 요나탄에게 어찌하여 다윗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물었습니다. 요나탄이 집안의 제사를 지내러 가도록 다윗을 보내주었다고 둘러대자 사울이 다음과 같이 심한 말을 퍼부었습니다. “이 더럽고 몹쓸 계집의 자식 놈아! 네가 이사이의 아들과 단짝이 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것이 바로 너의 망신이고 벌거벗은 네 어미의 망신이다. 이사이의 아들놈이 이 땅에 살아있는 한, 너도 네 나라도 안전하지 못하다. 그자는 죽어 마땅하니, 당장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아들여라.”(1사무 20,30-31) 사울의 말에 요나탄이 항의하자, 화가 난 사울은 창을 던져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요나탄은 들로 나가 숨어있던 다윗을 찾아가 자신이 알게 된 사울의 생각을 사실 그대로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하였습니다. “평안히 가게. 우리 둘은 ‘주님께서 나와 자네 사이에, 내 후손과 자네 후손 사이에 언제까지나 증인이 되실 것이네.’ 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는가!”(1사무 20,42)
다윗을 향한 요나탄의 마음에서 우리들이 추구하고 가져야 할 우정의 본보기를 봅니다. 진정한 우정은 ‘단순한 사랑의 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실에 바탕하고 이기심을 극복하는 정감’과 같은 것 아닐까요? 요나탄은 자신의 왕좌마저 위협할 수 있는 다윗이었지만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를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정을 맺는 당사자들 사이에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함께 계신다는 믿음’은 그 우정을 견고하게 할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우들은 참된 우정을 맺을 가능성에 훨씬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라 하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복된 교우들 사이의 우정은 결국 우리를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어갈 은총의 길이 될 것이고요.

도망한 다윗의 행보
무기도 챙길 겨를 없이 사울에게서 달아난 다윗은 아히멜렉 사제를 찾아가 잠시 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쳐 죽인 골리앗의 칼을 받아 나왔습니다. 이어서 다윗은 필리스티아 지방의 갓 임금 아키스를 찾아갔는데, 아키스의 신하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경계하자 극적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명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경계심을 풀고자 미친 척 연기를 하는 것이었지요.
목숨을 건진 다윗은 아둘남의 굴속으로 몸을 피하였는데, 아버지와 형제들을 비롯한 다윗 집안의 사람들, 그 밖에도 빚진 사람들을 비롯한 곤경에 빠진 사람들, 갖가지 불만에 찬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약 사백 명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이끌고 모압 임금에게 몸을 맡겼으나, 가드 예언자의 말을 듣고 그곳을 떠나 유다 지방의 헤렛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윗은 도망의 길에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미친 연기까지 마다치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말씀에 순명하는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이를테면 다윗은 예언자로부터 하느님의 뜻이 전해지자 자신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또 그렇게 제공된 은신처를 망설임 없이 나왔습니다. 자칫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곳으로 길을 떠났던 것이지요. 그것은 그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맡겼기에 가능했을 일이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많은 위기의 순간이 닥칠 수 있겠지요. 그때마다 나의 은신처를 찾아 숨어들기 이전에 하느님 뜻을 찾아 길을 나서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분명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니까요.

요나탄의 놀라운 겸손과 우정
다윗과 그 부하들의 소식을 듣게 된 사울은 다윗에게 도움을 준 놉의 사제들, 그 사제들이 살던 성읍의 주민들, 심지어 어린이와 젖먹이, 소와 나귀와 양들까지 모두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한편 다윗은 필리스티아인들이 크일라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을 구해냅니다. 이때 다윗은 하느님께 여쭈어보고서 허락을 받고 싸우러 나갔으며, 사울이 그곳으로 자신을 해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하느님께 여쭈어보고 광야의 산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손길 안에 머물렀던 다윗은 지프 광야의 호레스에서 사울의 추격을 피해 살았습니다. 그때 사울의 아들 요나탄이 찾아와 그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게. 나의 아버지 사울의 손이 자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네. 결국은 자네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고, 나는 자네 다음 자리에 있게 될 것일세. 아버지도 그걸 아신다네.”(1사무 23,17) 요나탄은 하느님 앞에서 다윗과 계약을 맺고 그를 떠나갔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은 요나탄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죠? 요나탄은 임금 자리를 물려받을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다윗의 능력을 알아보고 기꺼이 그보다 못한 처지를 자처했던 것입니다. 질투와 착각과 자만심을 떨쳐버리고 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지혜와 겸손의 덕을 구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