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적 배경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은 종료되었고, 전쟁 중 독일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벨기에는 독일의 식민지였던 르완다와 부룬디를 위임받아 1923년부터 통치하게 되었다. 당시 르완다는 다수의 후투족(85%)과 소수인 투치족(14%), 트와족(1%)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후투족은 주로 농사를 짓고, 투치족은 가축을 기르던 부족이었으나 언어와 문화와 풍습을 어느 정도 공유하여 서로 적대감 없이 함께 잘살고 있었다. 그러나 벨기에는 투치족과 후투족을 차별하여 후투족과 투치족이 분열하고 적대시하게 만듦으로써 르완다를 효과적으로 식민 통치하였다. 이에 따라 종족 간의 편견과 증오가 생겨났고, 훗날 르완다 대학살이 벌어지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한편 벨기에가 르완다에서 식민 통치와 함께 추진한 것이 가톨릭 전파였다. 르완다에 파견된 레옹폴 클라세 주교는 식민정책에 협조하면서 가톨릭의 전파에 매진하여 국민의 80%가 가톨릭 신자가 됐을 정도로 가톨릭 신앙을 부흥시켰다.
1959년 르완다 왕국이 세워졌지만 후투족의 반투치족 감정이 촉발되면서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투치족이 후투족에게 밀려나면서 국왕 키겔리 5세는 폐위되어 망명하였고, 1961년 1월 르완다는 공화국을 선포했다. 1962년 벨기에가 후속대책 없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르완다는 어정쩡한 독립을 이룬 상태에서 1962년 7월 유엔 감시하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국민의 다수였던 후투족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투치족에 대한 박해와 50만 명에 이르는 투치족의 해외 피난이 시작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정부의 만연한 부패와 군부 쿠데타, 그리고 망명 투치족의 반정부 무력투쟁이 이어지면서 르완다는 극심한 혼란과 분열에 빠졌다. 특히 1980년부터 2년 동안 르완다 전국에서 공공 기물의 파손이 만연했고, 가톨릭이 받은 모욕은 절정을 이루었다. 마을 입구에 있었던 예수상과 성모상이 거의 모두 훼손당했으며, 성직자도 소수만 남아 르완다의 가톨릭은 가난한 일반 신자들에 의하여 겨우 유지되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순간에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르완다의 키베호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2) 성모님의 발현
1981년 11월 28일 르완다 수도 키갈리로부터 남서쪽으로 120km 정도 떨어진 작고 가난한 마을 키베호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토요일 12시 35분경 성모님은 3명의 수녀가 운영하는 전문학교 식당 복도에서 고등학교 1학년 소녀인 알퐁신(17세)에게 나타나셨다. 알폰신은 흰옷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려오는 파란 베일을 쓴 아름다운 여인을 보자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은 다음 “당신은 누구신가요?”라고 물었다. 여인은 “나는 말씀의 어머니이다"라고 당신의 신분을 밝히시고,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다. 나는 너의 친구들도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라고 하신 후 미소를 지으며 사라지셨다. 이어 알퐁신은 15분 동안 탈혼 상태에 빠져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깨어난 후 수녀와 교사에게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설명하였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알퐁신이 미쳤다고 조롱하며, 알퐁신이 키베호 출신이 아니기에 특별해 보이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 이후에도 성모님은 알퐁신에게 기숙사, 학교 교정, 알퐁신의 방에 나타나셨으며 다음에 언제 발현하실지를 알려주셨다. 성모님의 발현 소식은 르완다 전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사람들은 성모님이 알려 주신 발현 날짜에 키베호로 몰려들었다. 교사와 학생들이 “우리는 성모님이 알퐁신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나타나신다면 성모님의 발현을 믿을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자 성모님은 응답하여 나탈리(20세)에게 나타나셨고, 신앙생활에 모범적이지도 않고 불신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준 마리 클레어(21세)에게도 나타나셨다. 1982년 8월 5일 성모님은 나탈리에게 발현 장소에 두 개의 성전을 지으라고 하셨으며, 9월 15일 마리 클레어에게는 전 세계에 성모칠고 묵주기도를 알리라는 사명을 주셨다.
한편 1982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2만 명의 군중이 학교 운동장에 운집하였고, 성모님은 나타나시어 탈혼 상태에 빠진 세 명의 시현자에게 꽃을 보여주셨다. 성모님이 꽃에 물을 주라고 하시며, 싱싱한 꽃은 마음을 하느님께 돌린 사람이고, 시든 꽃은 마음이 세속의 일에 빠진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8월 19일 성모님은 세 명의 시현자에게 8시간 동안 비극적인 장면을 보여주시면서 르완다가 하느님께 돌아가지 않는다면 피의 강을 이룰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이 환시와 예언에 대하여 처음에는 단순히 끔찍하고 놀라운 것이라고 여겼지만 12년 후 1994년에 내전이 터지며 불과 3개월 만에 시현자가 환시에서 목격한 대로 약 80만 명이 살해되어 피의 강에 버려지는 ‘르완다 대학살’이 일어났다.
3) 영화 ‘호텔 르완다’를 통해 본 르완다 대학살
1993년 12월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평화협정에 동의하면서 르완다의 종족 갈등이 봉합되었으며, 유엔군이 파견되었고, 수많은 외신기자가 르완다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1994년 4월 대통령이 전용기 피격 사건으로 사망하자 이를 빌미로 후투족 강경파가 후투족 온건파와 투치족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 폴은 투치족 아내와 가족을 호텔로 피신시켰는데 이후 수많은 피난민이 호텔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유엔군이 철수하면서 호텔마저 공격받게 되자 폴은 호텔을 포기하고 피난민과 함께 르완다를 탈출하여 1,268명의 목숨을 구하였다. 1994년 7월에 대학살이 종식되었지만 산업 시설은 모두 파괴되었고, 175만여 명의 피난민이 발생하였으며, 생존자의 70% 이상이 학살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4) 성모님의 발현 이후
성모님이 발현하신 이후 키베호를 방문하는 순례자가 늘어나자 주교는 1982년 3월부터 조사에 착수했으며, 1988년 8월 15일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키베호 성모님에 대한 공경과 발현 장소 순례를 허락하였다. 1992년 11월 미사고 대주교는 성모님 발현 11년을 기념하여 키베호를 ‘고통의 성모 성지’로 명명하고 성당 건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994년 성모님이 환영으로 보여주신 그대로 르완다 대학살이 일어났다. 학살이 종료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르완다 국민은 자신들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반성하며 다시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하였다. 르완다 국민들이 “서로 증오하는 마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라”라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자 르완다는 점점 안정되어 갔고,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되었다.
2001년 6월 29일 미사고 주교는 르완다의 모든 주교들과 함께 “발현을 거부하는 것보다 발현을 믿을 이유가 더 많다”라고 선언하며 성모님 발현을 공인하였고, 알퐁신, 나탈리, 클레어를 시현자로 결정하였다. 알퐁신은 교구의 지원을 받아 신학을 공부한 후 2006년 수녀가 되었으며, 나탈리는 키베호 성지를 관리하고 순례자를 돌보는 일에 평생 헌신하였다. 마리 클레어는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다가 르완다 대학살 때 남편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사진 설명(위로부터)>
- 고통의 성모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 성상.(좌) 고통의 성모 성당(우)
- 발현 광장과 그 뒤에 있는 발현 기념 경당, 원래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성모님이 발현한 장소를 경당으로 변경하였다.(좌) 성모 발현 기념 경당의 내부(우)
- 발현 당시의 알퐁신, 발현 당시의 나탈리, 발현 당시의 마리 클레어
- 영화 ‘호텔 르완다’의 포스터
- 고통의 성모 성당에서 주일 12시 미사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