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이브날 동생과 나란히 머리맡에 양말을 두고 밤사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줄 것을 기대하며 잠들었던 기억에 웃음이 난다. 동생은 더 큰 양말을 찾느라 장롱을 뒤져 어머니께 꾸중도 들었다.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된 니콜라오 성인은 부모가 부자였지만 일찍 돌아가셔서 물려받은 재산을 불우한 이들을 돕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헌신하는 데 바쳤다. 니콜라오 성인의 선행에 관해서는 여러 전설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결혼 지참금이 없어 출가하지 못했던 세 자매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고민 끝에 딸을 팔기로 작정했다. 니콜라오 성인은 이 사정을 듣고 난로 가에 걸어 놓은 양말 속에 황금을 넣어주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어린이들이 양말을 걸어 놓는 관습은 이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성 니콜라오, 라틴어로는 ‘상투스 니콜라우스’(Santus Nicolaus)이다. ‘산타 선물’은 미국에 이민한 네덜란드인들이 성 니콜라오 축일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는 관습에서 시작되었다.
소아시아의 가난한 교구인 미라의 주교였던 니콜라오는 열성과 성덕, 사랑의 실천에 대단한 분이었다. 억울하게 사형을 받게 된 3명의 청년을 구해 주거나 물에 빠진 선원들을 기적적으로 구해 준 니콜라오 성인은 지금도 선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축일은 12월 6일이고 특별히 젊은이들을 사랑했고 어린이, 상인, 여행자와 러시아의 수호성인이다.
니콜라오 성인이 사제로 서품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미라의 주교가 선종했는데 적당한 후임자가 없어 열심히 기도하던 주교들은 밤중에 하늘에서 “내일 아침 성당에 맨 먼저 들어오는 ‘니콜라오’라는 자를 뽑으라”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튿날 아침 아무 생각 없이 조배하러 성당에 갔던 니콜라오는 준비도 없이 즉시 주교로 축성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2006년 정진석 추기경님과 추기경 서임식을 위해 로마 한인신학원에 머물며 산책할 때 추기경님은 니콜라오 성인 이야기를 하다가 “부족한 내가 준비나 기대도 없이 추기경이 되었다”라며 웃으셨다. 이미 75세가 되어 교구장 사임서를 교황님께 제출한 상태인데 추기경이 되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 사람의 인생은 한 치 앞을 못 본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한국전쟁 당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제가 되기로 결심해
정진석 추기경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인 정원모(鄭元謨, 1909-?) 갈리스토는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다. 그는 1931년 3월 노동절 기념행사를 위한 격문을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기에, 정 추기경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다. 추기경에 서임되었을 때 기자가 가져온 당시 신문 1면 사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고 회고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집안의 금기사항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일본으로 갔는데 연락이 두절되었다”라고 했고, 어머니도 1996년 선종할 때까지 남편에 대해 아들에게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친척을 통해 들은 바로는 아버지는 사회주의 활동을 계속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북한에서 차관급인 화학공업성 부상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김일성이 남한에 올라온 인사들을 숙청할 때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6.25 전쟁이 일어나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된 바로 다음 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1학년이었던 정 추기경은 내무서에 붙들려 가 밤새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북한군 장교가 권총을 머리에 겨냥하고 위협하며 취조했지만 아버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을 알고 석방했다.
정 추기경은 한국전쟁 당시 널브러져 있던 시체들을 보고, 자신도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며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정 추기경은 외아들이기에 신학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어머니 이복순 루치아 여사의 간곡한 부탁으로 당시 교구장이었던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로부터 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았다. 1968년 로마 성 우르바노 대학원에 유학, 2년 뒤 같은 대학원에서 교회법 석사학위를 받고, 1970년 만 38세의 나이로 천주교 청주교구 제2대 교구장이 되었다. 66세였던 1998년 6월 29일,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후임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2006년 2월 22일 75세의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고, 3월 24일 추기경 서임식을 거행했다.
나는 1년 넘게 정 추기경을 직접 인터뷰하고 가톨릭평화신문에 ‘추기경 정진석’을 연재했다. 정 추기경님의 일생은 우리 근대사의 아픈 역사이다. 말년에 건강 악화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정 추기경은 2021년 4월 27일 늦은 밤, 향년 89세로 선종하였다. 정 추기경은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선종 후 정 추기경의 서약에 따라 안구적출이 즉시 진행되었다.
외국교회와 국내 복지기관에 큰 도움 주는 ‘정진석 추기경 선교후원회’
‘정진석 추기경 선교후원회’는 배우 고 김지영(마리아 막달레나, 1938~2017) 자매님이 나를 찾아와 2천만 원을 건네면서 시작되었다. “신부님이 갖고 계시다가 정진석 추기경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선교사업에 써주세요. 추기경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어요. 다만 지금은 말고 제가 세상을 떠난 후 추기경님께 전해주세요.” 2017년 김지영 자매님의 조문을 마치고 정진석 추기경님께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렸지만 추기경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무슨 활동을 하는 것에 난색을 보이셨다. 며칠 후 염수정 추기경님의 설득 말씀에 정 추기경님은 고인의 유지(遺志)는 받들어야 하지만,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활동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정 추기경님은 나중에 병석에서 내게 따로 말씀하셨는데 사무 공간의 사용이나 직원 인건비 등 교구에 조금이라도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사재를 정리하면서 당신 이름의 선교회에 5천만 원을 마지막으로 기부하셨다. 그 후에 정말 많은 은인들이 나타나 외국교회와 국내 복지기관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선교후원회의 활동을 보면서 시작은 작았지만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라는 욥기 8장의 말씀을 떠올리며 모든 것이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 하늘나라에서 보고 계시죠? 전쟁의 포화가 가득한 중동지역 병원의 어린이들이 추기경님의 이름으로 전달된 약으로 생명을 되찾고, 청소년들이 공부를 계속하는 것을 보시니 기쁘시죠? 유럽의 추운 거리에서 헤매는 난민들에게 따듯한 빵과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추기경님의 덕분이라고 기억될 겁니다. 사람이 죽어서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며 연구용으로라도 사용해달라며 안구적출을 고집하신 추기경님, 늘 부족한 저희들을 위해 하느님께 성모님과 함께 더 좋은 일을 많이 하도록 전구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