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2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니야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

나쁜 소식 전하기 
의과대학 교육과정 안에 ‘나쁜 소식 전하기’라는 주제가 있습니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거북한 일이지만, 의사 선생님들은 아무리 어렵고 부담스러워도 환자와 가족들에게 충격적인 정보를 전해야만 합니다. 특히 더 이상 치료할 수 없음을 알리는 일은 경험 많은 의사에게도 쉽지 않습니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몇 가지 프로토콜이 있지만, 아무리 조심스럽게 해도 환자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열심한 신앙인이자 헌신적인 의사로 사셨던 고 황기석 박사의 논문에는 ‘나쁜 소식’을 들은 환자들 가운데 극단적인 사례 세 가지가 실려 있습니다. 
첫째 사례는 한 수사님 경우입니다. 최종 진단은 말기 암이었는데, 이 결과를 어떻게 알려야 하나 고민하는 의사 선생님께 “나는 덕을 오래 닦아 온 사람이라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니, 바른대로 병세를 알려 달라”고 하시더랍니다. 그 말을 믿고 암 말기임을 알렸는데, 수사님은 심한 정신적 쇼크에 빠져 며칠 못 가고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둘째 사례는 강직하고 원만한 성품에 두터운 신앙심을 지녀온 의대 교수님 경우입니다. 이분은 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평소에 보였던 모습과 달리 굿을 하고 하느님을 저주하면서 몸부림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셋째 사례는 외과의사 선생님 이야기입니다. 평소 자기 아내의 신앙을 심히 못 마땅해하던 외과의가 자신의 병이 암으로 확인되었다는 말을 듣자, 솔선해서 신앙에 입문한 뒤에 동료들에게는 그간에 진 정신적 부채에 대해 용서를 구하면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난 경우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 보이는 모습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의대생들에게 환자와 의사소통하는 바람직한 방법들을 여러 가지 가르칩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소통하든 간에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환자에게 희망을 주라는 것입니다. 말기 환자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의학적으로 의미 없는 치료를 계속하도록 부추기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환자에게 끝까지 진실을 숨기고 거짓 희망을 주라는 것일까요? 많은 학생이 나쁜 소식을 알려야 할 의무와, 희망을 주라는 지침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을 겪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경우에도 당황하지 않고 희망을 말할 수 있지요. 우리 신앙인은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희망하기 
신앙인들이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희망 한 가지는, 비록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행복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바로 그것입니다. 약물이나 다른 방법을 통해서 통증을 조절하면서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이에게 불쌍하다는 연민의 눈길을 보내거나, 눈물부터 흘리고 볼 일이 아닙니다. 평소에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놓았던,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혹여 맺힌 것이 있다면 풀고, 아쉬웠던 것이 있으면 채웁니다.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처럼, 평소에 표현하지 못했던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병상의 마지막 시간을 행복한 기억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사제로서 많은 분들의 임종을 함께 했습니다. 세계적인 대도시의 병원에서 잠시 원목으로 일한 경험도 있어서, 갖은 인종과 배경을 가진 이들의 임종 병상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만난 분들 가운데 한 부부가 생각납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젊은 자매님이 남편과 함께 오셨습니다. 완화의료 외에 더 이상 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 삶을 마무리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너무 짧았고, 부부는 그 시간을 아름답게 채우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동식 산소탱크를 끌고 짧은 여행을 나섰다가 사제를 찾아 제게 온 것이었습니다. 
그날 자매님은 투병 이전에 즐기던 음식들을 맛있게 드셨습니다. 환자라는 사실도 잊고 한참을 깔깔대며 담소를 나누던 우리는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맞닥뜨렸지요. “신부님, 너무 두려워요. 죽고 나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떨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아렸지만, 환자가 희망과 믿음 속에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확고한 어투로 신앙이 가르치는 바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진 얼마 후, 자매님이 선종하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병상에서 마지막 모습은 지극히 편안하고 평화로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죽음으로도 구원을 이루신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반드시 세상에서 높이 사는 성공과 성취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흔히들 ‘성공’을 누릴 때 ‘복 받았다.’, ‘은총을 받았다’라고 말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도 구원을 이루십니다. 심지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선택하신 방법의 절정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이었지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유대교 수석 사제들은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43)하고 조롱합니다. 그들의 논리를 따르면,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겠습니다. 인생의 고통과 실패는 하느님이 내리신 벌이 되고, 고통받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내치신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인간 구원의 수단으로 선택하심으로써 우리가 고통과 실패, 또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까지 바꾸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뭇사람들이 좌절하고 포기할 때,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힘든 상황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라고, 죽음마저도 마지막 말은 아니라고 희망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넘어서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영원한 생명으로 불린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넘는 사랑의 증언, 위령기도
그런 면에서 위령기도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삶의 증언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 삶의 끝이지만, 우리 존재의 끝은 아닙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인간의 지상 순례의 끝일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떠난 신자들의 영혼을 위하여 전구하는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사랑을 믿고 실천합니다. 위령 성월에 바치는 미사, 위령기도, 돌아가신 분을 위한 묵주기도, 이 모든 기도들은 그저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 ‘할 도리를 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죽음도 막지 못하는 영원한 사랑을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