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천주교는 정식 신자가 되려면 일정 기간 교리를 배우고 미사에 참석하며, 신자가 되기를 준비한다. 교리반을 시작하기 전에 본당에서는 예비신자 환영식을 준비해서 이들을 맞이한다. 환영식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신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학벌과 직업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는 자발적으로, 어떤 이는 부모나 친지의 손에 인도되어, 어떤 이는 배우자와 결혼 조건을 채우기 위해 성당의 문을 두드린다. 때로는 여러 번 예비자 교리반에 등록했지만 제때 졸업하지 못한 영세 재수, 삼수생(?)도 눈에 띈다.
환영식에서 사제는 예비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사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예비자 “신앙을 청합니다.”
사제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예비자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사제는 다음의 기도로 환영식을 마친다.
“지극히 인자하신 성부여, 여기 있는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일찍부터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움을 주시는 당신을 찾다가 오늘 당신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 안에서 당신께 응답하였사오니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기꺼이 당신 사랑의 계획을 완성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자신의 의지로 또는 주위의 권고로 성당에 왔지만 이는 모두 주님의 부르심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비자 교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교리 기간 동안 예비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과는 다르게 변한다. 그래서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세례를 받게 되면 정말 내외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세례 이후의 신앙생활도 긴 마라톤경주와 같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어떤 때는 가파른 길을 오르며 넘어지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한다. 한동안 헤매고 쉬기도 한다.
성당에서 신앙생활도 재미가 있어야
한번은 어떤 자매님이 오셔서 걱정스런 얼굴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신부님! 우리 남편이 레지오 회합은 가는데 주일미사에는 잘 참여하지 않으니 어쩌죠?”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평일 단체회합은 꼬박꼬박 참석하는데 신자의 가장 큰 의무라고 생각되는 주일미사는 궐한다니. 얼핏 생각하면 이상하다 싶은데 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해도 간다. 본당 내 남성 레지오 회합은 대개 저녁에 끝나니 그냥 집에 가기가 아쉬워 2차 주회(酒會)로 이어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자매님, 그래도 레지오 나오는 것도 어디입니까? 그냥 두시면 언젠가는 성당 미사에도 열심히 나오시겠죠?”
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어떻든 흥미(?)가 있어야 한다. 기도에 재미를 붙이든, 강론 듣는 것에 재미를 느끼든, 친구를 만나는 것이 재미가 있든…. 하여튼 모든 일이 재미가 없으면 어렵고, 어려운 일이라도 재미가 있으면 즐겁기 마련이다. 특히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성당에 나오는 것인지, 친구들을 만나 놀러 나오는 것인지 부모님의 눈에는 차지 않는다. 하지만 성당에 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친구를 사귀든 어떤 흥미를 위해서건 성당에 오가는 자체가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앙생활을 좀 더 재미를 느끼면서 할 수는 없을까? 그래도 재미 중의 큰 재미는 사람 만나는 재미가 아닐까? 사람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을 자주 만나다 보면 사귀게 되고,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사랑을 느끼고 나누게 된다. 특히 믿는 이의 모임이라 할 수 있는 교회는 진정한 친교와 사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사람을 사귀고, 주님의 사귀고, 알고, 섬기는 그런 공동체 말이다.
보통 남자 형제님들은 시간이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시간은 있는 것이 아니라 내는 것이다. 나는 교우들이 모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 중요하고, 시작이 반이라고 용기를 내어 모임을 시작했다. 각 모임의 명칭을 정해주고 임원도 구성하고, 너무 빡빡하지 않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정식 프로그램으로 마지막에 간단히 소주잔을 기울이는 시간도 넣으면 프로그램에 거부반응(?)은 별로 없었다.
시간은 있는 것이 아니라 내는 것
30여 년 전 본당을 사목할 때 부임 후 첫 모임의 미사는 지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저녁에 미사를 지내기로 했다. 집도 드문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봉사자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큰 비닐하우스였다. 멀리서도 묵주기도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삼십여 평 남짓 되는 비닐하우스 안에 신자들이 꽉 차 있는 것이었다. ‘이 늦은 시각, 이 불편한 장소에 이토록 많은 신자들이 모여 있다니’ 하는 생각에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앉을 자리도 없어 서서 미사를 지내는 동안, 한 중년의 형제가 운동복(?) 차림으로 내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사 후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 그 형제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자신에 관해 이야기했다.
“저는 이 근처에 삽니다. 오랫동안 냉담을 한 이후 내 발로 성당을 다시 찾는 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돈도 벌고,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은 것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았습니다. 그러던 중 이웃의 형제가 며칠 전 나를 찾아와 이 지역에서 미사가 있으니 나오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그냥 겉으로만 대답했는데, 그 형제가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와서 미사에 꼭 참여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미사에 참석할 마음이 없어 친구 집에서 한잔하려고 운동복차림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매일 와서 미사에 참석하라고 권유하던 그 형제의 얼굴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내가 무엇인데 그토록 정성을 쏟아주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미사에 참석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겨 급하게 이곳에 달려왔습니다. 뒤늦게 미사에 참석해 몇십 년 만에 성가 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앞을 가려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젠 정말 열심히 성당에 나오겠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큰 박수로 환영해 주었고, 그 형제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나는 성당으로 돌아오며 오늘 그 형제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 것, 사람들이 서로 기쁘게 만나 미사를 봉헌한 것 등 이런 일보다 우리 사제에게 더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생각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재미이다. 이처럼 사람을 인도해 주는 봉사자가 있어야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다. 그 형제를 찾아가 미사에 계속 권고하신 신자분은 시간이 남아서 했을까? 주인의 불편한 기색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다른 이를 주님께 데려오는 이야말로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천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