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그의 악명만큼이나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판단력,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평소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해 화낼만한 일이 아닌데도 불같이 화를 내어 부하들은 마땅히 해야 할 보고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음 일화는 히틀러가 세계 2차 대전에서 패한 원인 중 하나로 분노를 꼽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합국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히틀러는 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절대 깨우지 말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은 그를 깨우지 못했다. 결국 연합군을 방어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을 놓치게 되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분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의 지독한 열등감에서 오는 콤플렉스였다는 견해도 있으나 원인이야 어떻든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한 영향은 크다.
미국 텍사스주 주립 대학 A&M 대학교 연구팀(2023년)은 특정 감정이 작업 수행 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여 국제학술지 ‘성격 및 사회 심리학 저널’에 발표하였다. 연구팀은 1000명 이상의 실험 참여자들에게 분노·즐거움·욕망·슬픔 등의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이미지를 보여준 다음, 난이도가 다양한 단어 퍼즐 풀기와 스키점프 비디오게임을 하게 했다. 실험 대상자들에게 특정한 감정을 끌어내어, 그 감정 상태에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 가는 정도를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과연 어떤 감정 상태가 단어 풀기와 게임에 도움이 되었을까?
결과는 상식과는 다르게 모든 실험에서 분노 감정이 유도된 실험 참가자들이 다른 감정이나 중립적 감정 상태의 사람보다 목표 달성률이 높았다. 비록 그들이 좋은 결과를 위해 부정행위를 더 많이 사용하기는 했지만, 게임에 대한 반응 시간도 짧았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어려운 단어 퍼즐에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 연구를 이끈 심리학·뇌과학자인 헤더 렌치 박사는 실험 결과에 대해 “분노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증가시켜 종종 더 큰 성공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준다”라며 “부정적 감정도 특정한 행동을 촉진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진다”라고 하였다.
분노가 원하는 목표 달성을 위한 노력 증가시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심리학자 매티스 바스 등이 실시한 실험(2011년도)도 있다. 그들은 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분노의 경험, 슬픈 일화, 평범한 어린 시절 이야기 등에 대해 에세이를 쓰게 하여 그룹별로 분노, 슬픔, 중립적인 감정을 갖게 했다. 그 뒤 그들에게 정해진 시간 동안 환경보호와 관련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게 하였는데, 이 실험에서도 분노의 감정 상태에 있던 참가자들이 더 많은 아이디어를 냈고, 틀에서 벗어난 사고로 더 독창적이었다고 한다. 연구진들은 슬픔이나 걱정 등에 비해 분노는 사람의 기분을 활발하게 하여 비록 사고의 체계성은 떨어지나 유연성을 증가시켜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관심을 두게 만든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영국 리버풀대학교 연구팀(2015년)은 목적과 동기만 정당하다면 직장에서 적절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업무 효율을 높이고 조직에 유익하다며, 이를 ‘도덕적 분노(moral anger)’라고 표현하였다. 즉 직장의 부당한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손해를 막을 뿐만 아니라 평등한 근무 환경을 조성하는 등 사회적인 순기능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유아 영세자인 K자매는 중년에 주위의 권유로 입단하였지만 고질적인 허리병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못 했다. 그러다 남편 퇴직 기념으로 간 해외 성지 순례에서 치유되어 그동안 고사했던 쁘레시디움 간부직을 수행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몇 년 후 좀 더 편안한 삶을 위해 지방으로 이사하여 단원 생활을 이어가고자 했는데, 그곳의 레지오 운영에 대한 실망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말한다.
“이사 가서 쁘레시디움 서기로 처음 꾸리아에 참석한 날 집에 와서 울었습니다. 간부추천서를 본 어떤 평의원이 그런 서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 말도 충격이었지만, 대충 빨리 끝내자는 분위기 속에 형식적으로 순서만을 지키고, 실속은 없는 성모님의 군대가 오합지졸 같아 너무 속상했거든요. 승리가 보장된 이 좋은 조직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다니 성모님은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그 마음을 생각하며 현재 꾸리아 간부직을 수행하며 조심스럽게 하나씩 개선해 나가고는 있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변화가 그리 쉽지는 않아 버티는 힘을 얻고자 더 열심히 기도합니다.”
악에 대한 분노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를 성모님의 군사로 만들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된 것을 보고 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고 탁자들도 엎어 버리고, 돈도 쏟아 버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한다. 옳지 않은 일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인 의분(義憤)은 반사회적 행동이나 공격적 행동이 아니다. 그러니 먼저, 분노하게 되는 상황을 살펴야 한다. 나는 어떤 상황에 분노하는가? 활동 대상자들의 무관심과 노골적인 멸시에 분노하는가? 아니면 동료 단원들의 불성실과 간부들의 무책임에 분노하는가? 혹시 내가 단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될 때 분노하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생각해 봐야 한다. 예수님은 오해와 멸시 속에서 죄 많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니 우리가 정작 분노해야 할 것은 세상에 죄악의 왕국이 커지는 현상이다. 그리고 죄악의 왕국을 쳐부수고 그 뿌리를 뽑아, 그 자리에 왕이신 그리스도의 깃발을 세우는 것이 레지오의 목적(교본 303쪽 참조)임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이 분노야말로 성모님 군사로서의 책임감이며 열정이지 않은가!
교본에 ‘어디에서나 선행을 행하여라. 그대의 선행은 모든 이를 향상시키며, 사람들이 영신적으로 향상될 때 죄악의 전투 대열은 무너지고 만다’(467~468쪽)라고 되어 있다. 또한 ‘(죄악이 판치는 경우) 그 치료법은 단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신심 조직을 강력하고도 꾸준하게 활용하는 것이다’(교본 467쪽)라고도 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아직도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해야 하며, 그 분노는 레지오 조직에 충성을 다하며 꾸준히 선을 행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리하면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만큼 커지는 악에 대한 분노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성모님의 군사다운 면모를 갖추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심리상담 분야에 저명한 독일 학자 알무트 슈말레-리델이 한 다음 말은 울림이 크다. “분노는 나를 생기있게 만들고, 나 자신과 나의 가치관, 관점, 욕구를 옹호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귀한 존재이다.”
‘무서운 죄악과 무질서도 치유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교본 4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