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연 마태오 신부는 1999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현재는 인천교구 성 김대건 성당 주임신부이다. 어둠이 가시기 전에 일어나 묵상 글로 세상을 깨우고 있으며, 회원 수 2만 명이 넘는 인터넷카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를 운영하고 있다. ‘빠다킹’이라는 별명은 목소리가 느끼하다며 2000년에 중학생 아이들이 지어 준 별명으로, 현재까지 이 별명을 사용한다.
저서는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 ‘날마다 행복해지는 책’,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희망가게’, ‘행복한 하루’, ‘사랑이 숨어 있는 사막’,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방향을 바꾸면’, ‘나보란 듯 사는 삶’, ‘맘고생크림케이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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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1주간(11월 3-9일)
사랑만이 가장 올바른 판단해
미사 마치고 복사들과 함께 제의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대복사를 선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오늘 너무 긴장해서 몇 군데 틀렸다는 것입니다. 미사 끝나고 나면, 복사 친구들이 틀렸다고 놀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례 때 종종 틀렸다면서 찾아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복사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해설자가 잘못 해설했다고, 독서자가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등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틀린 것만 봤고 지적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전례는 ‘맞다, 틀리다’의 관점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물론 바른 자세와 바른 순서에 따라 바른 전례 예식이 거행되는 것은 우리의 일치와 정성스러움이 드러나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전례의 전부는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 10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례에서, 특히 성찬례에서, 마치 샘에서처럼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고, 또한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이 그 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이 가장 커다란 효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맞는지 틀리는지의 관점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서 우리 존재가 진정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참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이 기준만 기억한다면 틀린 것이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만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판단도 맞는지, 틀리는지였습니다. 이 판단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이루어지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틀렸다’라고 말했고,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은 오로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분명히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오히려 그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맞다, 틀렸다’라는 말로 상대에게 때로는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 전에 사랑의 기준으로 따져보았으면 합니다. 사랑만이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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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간(11월 10-16일)
선(善)은 나누어야 한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아십니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고, 미국 화폐 100달러에 새겨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피뢰침, 다초점 렌즈, 민간형 비행기, 뇌파 측정기, 홀리 그램 기술 등 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발명품에 전혀 특허를 내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발명품을 통해 큰 혜택을 누리고 있듯이 자신의 발명품으로 타인을 도울 기회가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이러한 봉사를 거리낌 없고 아낌없이 행해야 한다.”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은 실제로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정당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인생철학은 ‘선(善)은 나누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큰 어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100달러에 새겨진 것이며, 지금도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성직자로 사는 저도 금전적 문제에 자유롭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사실 본당 부채가 많아서 신자들에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늘 ‘돈’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주님께서 칭찬한 사람은 여유 있는 가운데 봉헌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던 과부였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느님은 헌금을 받을 때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그 바치는 마음을 헤아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먼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선(善)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눌 수 없는 이유보다 나눌 수 있는 이유를 먼저 봐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눔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주님께서 나머지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진정한 풍요를 체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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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간(11월 17-23일)
약간의 선의만으로도 거룩해져
“오, 예수님. 거룩해진다는 건 얼마나 쉬운지요. 선의만 조금 있으면 되니까요. 예수님은 영혼 안에서 매우 작은 선의라도 발견하시면 서둘러 당신을 영혼에게 주십니다. 그때는 영혼의 잘못도, 넘어짐도,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매우 관대하시며 아무한테도 당신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시기까지 하는 분입니다. 성덕에 이르는 지름길은 성령의 영감에 충실히 머무는 것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님의 일기 중 일부입니다. 성녀의 말씀처럼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약간의 선의만으로도 거룩해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약간의 선의에도 조건이 붙으면서 주님의 활동을 가로막아 자기의 거룩함은 물론이고 하느님의 거룩함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게 됩니다.
악습에 빠진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에 대한 비판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었는지 만나면 먼저 비판부터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기 변화를 위해, 비판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성호경을 그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느 순간부터 비판이 아닌 상대방의 좋은 점을 먼저 찾게 되었습니다.
성호경으로 주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변화시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 것입니다. 성호경이 힘든 기도일까요? 성호경 하는데 5분에 걸쳐서 해야 한다면 힘들다고 인정하겠지만, 5초면 충분히 마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까? 이 조금의 선의를 통해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꿔서 거룩해지게 된 것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까? 이런 선의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세상을 살면서 불안해하고 걱정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약간의 선의만으로도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십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우리의 선의를 세상에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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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11월 24-30일)
부정적 감정이 들면 주님께 집중해야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 형제님으로부터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정치인에 대한 분노로 “때려죽이고 싶어요.”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정치인 때문에 지금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도 그런 마음이 들었냐고 물으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하십니다. 또 그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은데, 그 사람들도 모두 죽여야 하냐고 물으니 역시 그렇지 않다고 답하십니다. 생각해 보니 자기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마음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며 머쓱한 표정을 지으십니다. 누군가 분노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분노는 숙주의 목숨을 앗아가는 기생충이다.’
분노를 갖게 되면 불행하게 됩니다. 분노를 벗어던지지 않으면 처음 가졌던 분노가 점점 몸집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분노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분노라는 감정을 계속 쌓아두면 이 감정에 잡아먹혀 불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분노라는 감정을 벗어던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분노 등의 부정적 감정은 어디에 집중할 때 흐려지거나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 묵상 등의 신앙생활로 성찰하면서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땀을 흘리는 운동을 하거나, 또 악기 연주에 집중하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선을 바꾸지 않고 계속 분노에만 머물게 되면 분명 불행해집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의 감정 때문입니다.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으며, 자기들이 강조하는 율법을 사랑이라는 이유로 지키지 않는 모습에 분노한 것입니다. 그 분노가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떨까요?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만 집중한다면, 또 자기만 옳다는 이기심을 놓지 못한다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