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교구 내에 아직도 정비되고 있지 않거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의 흔적을 찾기 위해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산 106번지, 하느님의 종 서응권 요한(1827-1866?)의 묘소를 찾았다. 서응권 요한은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시복이 추진 중이다.
최태준 필립보 마산 레지아 담당사제를 비롯하여 함안 꼬미씨움(단장 이미호 베네딕토) 단원들과 함께 순교자의 묘지를 찾았으나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탓에 진입로부터 잡초가 무성하여 예초기를 동원해 길을 내면서 찾아가는 험난한 일이었지만 순교자의 묘지를 정비하여 이곳을 찾아올 순례자들이 순교자의 참 신앙의 정신을 본받을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불볕더위와 사투를 벌였다.
경상남도 김해 지방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로 이 지방에 귀양 온 이학규에 의해서 순교자 박대식 빅토리노 가정이 신앙을 받아들일 때였다.
달성 서씨(達成徐氏)의 현감 공파인 서응권(성겸) 요한은 김해군 이북면 장방리에 살았다. 그의 집안은 나라의 높은 벼슬을 한 문벌이 대단히 좋은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세례를 받은 후에 농사를 지으며 부인 윤씨(안나)와 여섯 자녀와 함께 열심히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박근기 사건으로 인한 세 자녀의 죽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1868년 5월 부산에서는 이른바 박근기(朴根基) 사건이 발생했다. 박근기를 비롯하여 서달서, 서근서, 서상달, 서응권과 노재익 등이 부산에 사는 왜인들을 통해 서양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을 의논하고, 그것을 실천하려던 중 박근기가 현장에서 체포되고 심문을 받았으며, 동참했던 사람들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서응권은 거주지인 김해 노루목에 피신해 숨어 있었다. 포졸들이 그곳까지 와서 서응권 부부를 체포하려 했으나 찾지 못하자 칼을 휘둘러 어린 자녀 셋을 죽이고 돌아갔다. 큰아들 석원 베네딕토(20세)와 둘째 석형(16세)과 셋째 석수(13세)는 어린 동생들을 잘 돌보라는 부모님들의 부탁을 받았는데, 포졸들이 갑자기 덮치자 당황하여 동생들은 버려둔 채 사방으로 도망을 갔던 것이다.
그때 죽은 세 자녀는 7세, 4세 아들 2명과 갓 돌이 지난 젖먹이 딸이었다. 이에 심한 충격을 받은 두 부부는 “우리 대신 이 어린것들이 모두 죽고 말았으니, 또 이제 이곳에서 농사도 지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우리만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차라리 자수하여 어린 것과 함께 순교하자.” 하면서 부인 윤씨와 함께 김해 관아에 자수했다.
부부는 혹독한 문초와 심문을 받고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러자 관헌들은 잡혀 온 많은 다른 신자와 함께 이들에게 날카로운 쇠 송곳 여러 개를 불에 달구어 세워놓고서 “너희들이 앞으로 성교를 믿으려고 하면 이 송곳들을 밟고 지나가고, 안 믿겠다면 지나가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와 그의 부인은 서슴없이 뜨거운 송곳들을 밟고 지나갔고, 또한 다른 많은 신자도 지나갔다. 포졸들이 이들에게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다. 물론 이때 “믿지 않겠다!”하고 말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끝까지 신앙을 고백한 그와 그의 부인 및 남은 신자들은 모두 순교하였다.
혹독한 형벌 끝에 순교로 신앙 증거
이들이 순교한 후 그들의 시신을 그 자리에 큰 구덩이를 파고 함께 묻었다. 두 달 후에 가족들이 시신을 안장하기 위해 무덤을 파니 이미 초여름의 뜨거운 날씨에도 신비롭게도 시신들이 하나도 상하지 않은 채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있었다. 이것을 보고 모두 “정말 하느님께서 보살피셔서 기적이 일어났구나!” 하면서 감탄하였다. 각 시신을 찾아 염습하고 다시 매장을 하려고 하자 그제야 시신에서 피가 나왔다. 이렇듯 서응권과 그의 부인 윤씨, 자녀 세 명 및 다른 많은 이들이 믿음을 증거하다 장하게 순교하였다.
이후에 가족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선산에 모시려 했지만, 친족들의 반대로 김해시 주촌면 내삼리 인근 야산에 임시 안장을 했다가 1909년 4월 순교자의 삼남 서석수 비오가 현 위치에 모셨다.
서응권의 남은 자녀 3명인 석원, 석정, 석수는 부모들과 같이 순교는 하지 않았지만 계속 노루목에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후손들을 많이 낳았다. 그의 후손 중에는 현재 김해시 이북면 장방리(노루목)에 살면서 공소회장을 한 5대 종손 서성효 마태오와 서정의 수사(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서경윤 알베르토 신부(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 및 서원열 신부(마산교구)가 있으며, 최재선 주교(부산교구)와 박도식 신부, 박문식 신부(대구대교구), 김재문 신부(안동교구)는 이 순교자의 외손이 된다.<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해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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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의 묘지는 경남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산 106번지에 있으며, 마산교구 홈페이지에 찾아가는 길이 자세히 안내되어 있다.
<사진설명-위로부터>
- 깨끗하게 정비된 순교자 묘지
- 잡초로 무성한 순교자 묘지(좌) 먼지로 뒤덮인 순교자 비석(우)
- 묘지 정비를 함께한 단원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