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도덕적, 윤리적 감수성과 태도는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자녀의 도덕적, 윤리적 양성은 부모의 가장 큰 의무의 하나입니다. 교육자로서 “부모는 자녀의 의지를 길러 주고 좋은 습관과 선한 것에 끌리는 마음을 함양시켜 줄 책임이 있습니다”(‘사랑의 기쁨’, 264항). 도덕적 양성은 불완전한 존재에서 더욱 온전한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자녀의 윤리적 양성이란 사회에 적응하려는 열망을 갖게 하고, 사회적 규범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습관을 키워주는 일입니다. 또한 “더 높은 가치를 향한 열린 마음가짐을 키워주는” 일이기도 합니다(264항).
자녀의 “도덕적 양성은 언제나 능동적인 방법과 교육적인 대화로 이루어져야 합니다”(264항). 일방적 가르침과 지시하는 방식으로는 도덕적 양성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도덕적 양성은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하는 귀납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녀에게 절대적이고 의심 없는 진리들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 스스로 특정한 가치와 원칙과 규범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여야 합니다”(264항).
“습관이 영성입니다.”(제임스 K.A. 스미스)
도덕, 윤리, 영성은 어쩌면 몸에 밴 습관과 태도를 통해 드러납니다. 올바른 행동을 위해서는 바른 판단을 위한 지식과 신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식과 신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신념이 아무리 확고하더라도 흔히 늘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의 양심이 특정한 도덕적 결심을 하게 해 줄지라도, 때로는 매혹적인 요소들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265항). 생각과 신념은 감정과 욕망을 잘 이기지 못합니다. 감정의 변덕스러움과 욕망의 충동을 극복하고 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생각과 신념이 마음과 몸에 깊이 배어들어야 합니다. 즉, “지성으로 파악된 선이 우리 내면에 깊은 정서적 성향으로, 마치 선을 향한 목마름처럼, 뿌리내려야”(265항) 합니다.
도덕적 의무와 규범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는 효과적인 윤리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옳은 일을 위한 노력과 희생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우쳐 줄 수 있어야 합니다(265항). 즉, 단순히 도덕적으로 옳고 선한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보다는 그 일을 향한 노력과 희생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그리고 그 노력과 희생이 우리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규범과 당위로서의 도덕보다는 진정한 기쁨과 의미로서의 도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습관을 잘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생긴 습관조차도 내면화된 중요한 가치들을 건전하고 일관된 외적 행동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266항). 도덕적 가치와 규범을 단순히 머리로 가르치기보다는 그 도덕적 가치와 규범을 표현하고 실천하게 하는 습관과 태도를 몸에 배게 해야 합니다. 선한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좋은 행동을 습관적으로 반복하게 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좋은 행동 방식을 의식적으로 자유롭고 품위 있게 반복”하게 하는 훈련은 자녀의 도덕적 양성에 핵심적입니다(266항). 좋은 행동의 습관적 반복을 통해 올바른 신념과 그 신념을 실천하게 하는 선한 의지를 조금씩 몸과 마음에 배게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습관이 올바른 신념을 낳고 선한 의지를 키웁니다. 물론, 올바른 신념과 선한 의지가 좋은 행동을 낳습니다. “덕은 내적 원칙과 확고한 행동으로 변화된 신념입니다”(267항). 하지만 아무리 좋은 신념이라 할지라도 부단한 노력을 통해 습관화되지 않는다면 이론과 구호에 그칠 위험이 있습니다. 덕이란 몸에 밴 습관으로 표현됩니다.
도덕적 양성은 강요와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녀 스스로 선행을 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자유롭고 자율적인 도덕적 양성을 위해서는 “제안, 동기, 실질적 적용, 자극, 보상, 모범, 예시, 상징, 성찰, 격려, 행동 방식의 검토, 대화”(267항) 등의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진정한 훈육은 격려입니다
오늘날 자녀 교육에서 훈육이 사라졌습니다. 지난 시절의 훈육 방식은 위계적이고 강압적이며 일방적인 형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훈육이 강압적인 질책과 언어적, 육체적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교육에 있어서 훈육이 왜곡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 ‘훈육’이라는 말은 교육의 현장에서 거의 금기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꾸짖고 질책하는 일은 꼰대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들의 자존감을 키워준다는 명분으로, 자녀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는 명분으로, 자녀들의 잘못을 방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훈육을 철 지난 교육 방식으로 치부합니다.
자녀들이 반사회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했을 때, 그 잘못된 행동의 결과를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268항). “자녀가 다른 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다른 이에게 입힌 고통을 뉘우치는 능력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자녀가 용서를 청하고 다른 이에게 입힌 피해를 바로잡도록 확실히 교육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268항). 훈육의 과정이 힘들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종국에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녀 교육에 훈육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훈육은 섬세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늘 꾸짖는 태도는 자녀 행동의 심각성의 경중을 가리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자녀의 낙담과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269항). 부모는 자신 역시 흠결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자신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할 줄 알고 개선을 위하여 스스로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부모는 자신이 화가 나도 자제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자녀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269항). 부모와 자녀의 사랑과 신뢰 안에서 훈육은 질책이 아니라 격려가 됩니다.
훈육이 자녀의 길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거나 방해가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지만, 훈육은 때때로 건설적인 통제의 방식으로 작동됩니다(270항). 올바른 훈육이 되기 위해서는 “똑같이 해로운 두 극단의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한 극단은 모든 것에서 자녀의 바람에만 초점을 맞추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녀는 자신의 책임보다는 권리만을 생각하며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극단은 자녀가 자신의 존엄, 고유한 정체성, 권리를 의식하지 못하며 자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녀는 자신의 의무와 다른 사람들의 바람까지 실현하여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눌리게 될 것입니다”(270항).
자녀 교육에 좋은 훈육은 절실히 필요합니다. 올바른 훈육을 위해서는 부모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참꼰대가 되는 일은 꼰대가 되지 않는 일보다 훨씬 어렵습니다”(김영민, 중앙일보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