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벨기에 바뇌(1933년)
최하경 대건안드레아 서울대교구 도곡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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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적 배경
성모님이 발현한 바뇌 성지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대도시는 북쪽으로 27km 정도 떨어진 공업도시 리에주이다. 리에주는 벨기에 동부의 거점 도시로, 독일과의 국경선까지 거리가 43km 밖에 안 되어 차로 30분만 가면 독일 땅을 밟을 수 있다. 반대로 독일의 입장에서는 차로 30분만 이동하면 벨기에의 리에주에 도착할 수 있고, 만약 리에주를 확보한다면 프랑스 파리를 직선거리로 쳐들어갈 수 있는 전진기지를 구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다. 동시에 독일은 프랑스로 진격하기 위해 벨기에 영토를 통과하겠다고 요구하였으나 벨기에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독일은 중립을 선언한 벨기에를 무시하고 리에주를 침략하였으며, 진격이 지체된 것에 대한 복수로 벨기에인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수탈하였다.
1932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년 이상이 지났지만 독일과 인접한 리에주 지역은 독일의 만행을 잊지 못하였고, 현실은 여전히 답답할 뿐이었다. 벨기에는 독일의 침략을 막지 못한 알베르 1세가 여전히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반면, 독일은 히틀러가 등장하여 다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대안이 없을 때 리에주 지방에서 살고 있는 벨기에인들이 선택한 것이 사회주의였다. 주민들은 잘나가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지켜보며 사회주의만이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고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 결과, 리에주 지역의 주민들은 마르크스를 따르며 가톨릭 신앙을 저버렸고, 교회와 관련한 활동에 무관심해졌다. 이와 같이 가톨릭 신앙이 고사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성모님이 리에주 인근의 가난한 마을 바뇌에서 발현하셨다.

2) 성모님의 발현
성모님은 1933년 1월 15일부터 3월 12일까지 벨기에의 보랭과 비슷한 시간대인 저녁 7시를 전후하여 총 8번을 발현하셨다. 벨기에 보랭에서 1월 3일 마지막으로 발현하시고, 12일 만에 산골 마을 20241023114105_694204693.jpg바뇌에서 다시 발현하신 것이다. 15일 저녁 7시경, 가톨릭에 냉담한 베코 가족의 칠 남매 중 맏이인 12세 마리에트 베코는 친구 집에 놀러 간 남동생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보다가 정원에서 타원형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 빛 속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는데, 마리에트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라고 손짓하였다. 여인은 흰색 옷에 머리에서 발까지 내려오는 긴 베일을 걸치고 하늘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어서 루르드의 성모님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마리에트는 언젠가 우연히 시골길에서 주웠던 묵주를 들고 기도를 시작하자 여인은 사라졌다.
다음 날 마리에트는 본당 신부님에게 여인의 발현을 전하였지만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마리에트는 여인의 강렬한 영적인 힘에 이끌려 수요일 아침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교리반에도 다시 나갔으며, 추운 겨울날에도 밤마다 정원에 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회심했다. 18일에도 저녁 7시경, 마리에트는 정원에서 무릎을 끊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는데 여인이 나타나 20분 동안 말없이 마리에트를 바라보다가 당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여인은 뒷걸음질로 가다가 두 번 잠시 멈춰 섰는데, 그때마다 마리에트는 땅에 무릎을 꿇었다. 여인은 마리에트를 길옆에 있는 작은 샘으로 인도하고 처음으로 말을 하셨다. “네 손을 물에 담그거라.” 마리에트는 두 손을 그 찬 샘물 속 밑바닥까지 밀어 넣었다. 여인은 이어서 “이 샘은 나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샘물을 마시거라. 다시 보도록 하자”라는 말씀을 남기고 사라지셨다. 
19일 마리에트가 정원에서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여인이 세 번째로 나타났다. 마리에트는 “아름다운 여인이시여,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여인은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 마리아이다”라고 당신의 신분을 알려 주셨다. 이후 바뇌 성모님은 ‘가난한 이들의 성모’라고 불렸으며, 바뇌 성모님을 향한 신심으로 ‘국제 기도회’라는 조직이 결성되어 2백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전 세계에서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 성모님은 네 번째 발현에서 작은 경당을 원하신다고 하셨으며, 다섯 번째 발현에서는 “나는 고통을 덜어주려고 왔다”라고 하셨다. 여섯 번째 발현에서 마리에트가 발현의 증거를 요청하자 “나를 믿거라. 나도 너희를 믿을 것이다”라고 하셨으며 일곱 번째 발현에서는 “기도하거라, 많이 기도하거라”라고 말씀하셨다. 여덟 번째 성모님은 마지막으로 발현하시어 마리에트를 바라보시다가 슬픈 표정으로 “나는 구세주의 어머님이다. 기도를 많이 하여라”라고 말씀하시고 마리에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하신 다음 성호를 긋고 사라지셨다. 이 마지막 발현은 5분여 동안 일어났으며 수백 명의 군중이 함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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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모님의 발현 이후
1932년 마무르 지역의 보랭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여 수많은 벨기에 신자들이 회심하였지만 독일 국경과 인접한 리에주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모님 발현 사건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조롱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모님이 보랭에서의 발현이 끝난 후 12일 만에 다시 바뇌에서 발현하시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더구나 바뇌에서는 기적의 샘을 통한 치유가 일어나면서 성모님에 대한 공경이 불같이 치솟았고 연일 순례자들이 쇄도하였다. 그리고 보랭과 같이 냉담자와 이단자, 이교도들의 회개가 수없이 이어졌다. 이에 성모님이 네 번째 발현에서 지시하신 대로 성모 발현 기념 경당이 신속히 세워졌다. 1933년 4월 18일에 경당 건립 승인을 받고, 5월 16일에 초석이 놓였으며,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경당이 봉헌되었는데 이날에 무려 6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참석하였다. 이는 얼마나 빠른 시간에 벨기에의 가톨릭 신앙이 원상태로 회복됐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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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당은 교황청의 인정을 받은 16곳의 성모님 발현 성지의 발현 기념 경당 중 규모가 가장 작다. 경당 정면에 있는 세 개의 아치를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간신히 서 있을 공간밖에 없어서 그 소박함에 놀라게 된다. 가난한 이들의 성모님이란 호칭에 걸맞은 경당이라고 할 수 있다. 리에주 교구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935년부터 2년 동안 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후 교황청에 보고했다. 리에주 교구의 20241023114105_151393716.jpg주교는 1942년 바뇌의 성모님에 대한 공경을 허락하였고, 1949년 8월 22일 성모님의 발현을 공인하면서 발현 사실을 온 세계에 알리고, 발현에서 유래하는 은총을 널리 전파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5년 5월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순방하던 중 18일에는 보랭 성지를, 21일에는 바뇌 성지를 방문하였다. 교황은 바뇌 성모 발현 기념 경당에서 기도를 바치고, 경당에서 기적의 샘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었으며, 기적의 샘에 손도 담갔다. 또한 교황은 시현자 마리에트를 직접 만났으며 병자들을 위한 기념 미사를 집전하였는데 이 자리엔 1만 병의 신자들이 참석하였다. 
시현자 마리에트는 가난한 마을 바뇌에서도 제일 가난한 집에서 맏이로 태어나 변변한 교육조차 받지 못해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것 같던 아이였지만 성모님이 시현자로 선택하였다. 그녀는 성모님을 시현한 이후 사람들이 과도한 관심과 조롱,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지만 잘 견뎌냈다. 그녀는 21세에 결혼하여 두 자녀를 낳고 평범하게 살다가 9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사진 설명(위로부터)>
-  바뇌 기적의 샘에 모셔진 성모님 성상.(좌) 바뇌 기적의 샘의 모습. 순례자들이 모여 샘에 손을 담그고, 샘물을 마신다.(우)
-  성모 발현 당시의 마리에트 베코의 어린 모습.
-  1933년 8월 15일 성모 발현 기념 경당의 봉헌식. 오른쪽에 시현자 마리에트의 집이 보인다.(좌)
성모 발현 기념 경당의 제단화. 마리에트의 증언에 따라 다섯 번이나 수정한 끝에 완성되었다.(우)
-  성모 발현 기념 경당에서 기도를 바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좌) 기적의 샘에 손을 담그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우)
-  마리에트의 장례미사. 5천 명의 신자가 함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