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성인 이야기
학생, 수험생,
임종하는 이의 수호성인들
이석규 베드로 자유기고가

학문 연마자의 수호성인, 성 암브로시오(축일 12월 7일)
20241023113728_272009923.jpg성 암브로시오는 4세기에 독일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사망 후 로마로 이주하여 인문학 교육을 받았다. 수사학, 법학, 그리스어에 탁월했던 성인은 관료의 길을 택해 뛰어난 실력과 좋은 배경에 힘입어 30대 초반에 밀라노의 집정관이 되었다. 당시 말라노의 주교는 아리우스 이단에 빠져 교회에서 파문된 사람이었다. 이 주교가 죽은 뒤 후임 주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정통 교의를 따르는 신자들과 아리우스주의자들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런데 평화적 방법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호소하던 집정관이 뜻밖에도 주교로 선출되었다. 35세의 젊은 암브로시오 집정관은 세례도 받지 않은 예비신자였으나 시민들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세례를 받고, 8일 뒤에 주교품을 받았다.
당시 밀라노는 로마 제국 서부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고, 따라서 그곳의 주교직 또한 불가피하게 교회 안팎의 온갖 일들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였다. 마침 성인의 형제로서 지방 정부의 지사로 일하던 성 사티로가 교구의 세속적 행정 업무를 돕기로 하면서 성인은 영적인 일들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성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재산을 희사하고, 수도자처럼 극기하며 청빈한 삶을 사는 한편 신학과 성경 등의 공부에 매진했다. 본래 언변이 뛰어난 데다 신학적 성취까지 이룬 성인은 탁월한 설교자로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서 황제를 비롯한 권력층을 설득해 가며 아리우스주의 이단을 물리치고 교회를 지켜냈다.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성인은 또한 학문을 하는 사람의 수호성인으로서도 공경을 받는다.

학교와 학생의 수호성인, 성 요셉 데 갈라산즈(축일 8월 25일)20241023113728_630046620.jpg
16~17세기의 성 요셉 데 갈라산즈는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이어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에 어머니와 형이 사망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성인이 결혼하여 가문을 이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성인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27세 때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교구장 주교의 고문 신학자이자 교구장 대리로서 피레네산맥 일대의 외딴 지역에서 활동하는 성직자들의 쇄신과 신앙 재건을 위한 소임을 맡았다.
스페인에서 소임을 수행한 뒤 성인은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한 추기경의 고문 신학자로 활동했다. 그런 한편으로 교육과 자선 활동을 위한 공동체를 꿈꾸었다. 일반 시민들의 무지와 도덕적 타락을 개선하고, 특히 버림받은 고아들을 보살피며 교육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본 것이다. 마침내 41세 때 두 사제와 함께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를 세우고, 빈민가에 유럽 최초의 무료 공립학교를 열었다. 이 공동체는 설립 20년 만에 공식 수도회로 승인되고, 그 4년 뒤에는 교황청의 정식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성인은 이 수도회의 종신 총장이 되었다.
성인은 이 공동체에서 초창기에는 주로 초등학교 과정에서 가르쳤고, 차츰 교과과정을 면밀히 구성하여 학생들이 선(善)을 사랑하도록 이끈다는 교육 원칙을 바탕으로, 학교를 초급과 중급으로 체계화했다. “학생들은 신앙과 인문학 교육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행복함을 알게 된다.”는 신념으로 일관한 성인을 비오 12세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교 학교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했다.

수험생의 수호성인,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축일 9월 18일)
20241023113728_361121220.jpg17세기에 이탈리아 코페르티노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성인은 소년기에 제화공의 견습생으로 일했다. 몸이 약해 일을 그만둔 뒤 콘벤투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고,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갔다가 8개월 만에 쫓겨났다. 공부하는 재능이 부족한 데다가 눈치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 뒤 한 콘벤투알 수도원에서 마부로 일하며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 있다가 수련자로서 지내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자질이 부족해서 수도회 입회조차 거절당했던 성인이 끝내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성인은 탈혼, 기적 그리고 초자연적인 은총을 받은 사제로 널리 알려졌다. 탈혼 상태에서 공중에 떠오르는가 하면, 미래의 일을 내다보고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영적인 지도와 병을 치유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성인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러다 보니 시기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단이란 의혹도 받았다. 장상의 명을 받들어 사람 없는 곳에 가서 숨어 지내려고도 했지만, 성인의 명성은 점점 더 퍼져나갔고, 그럴수록 더욱 단절된 곳으로 옮겨 가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끝내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음을 인정받은 성인은 공중 부양의 기적과 관련해서 비행기와 우주선의 조종사들, 항공 승무원, 항공 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공부에 재능이 없던 성인이 사제직을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검증, 곧 지적인 시험을 거뜬히 통과했기에 시험을 앞둔 수험생의 수호성인으로도 공경을 받는다. 
여기에는 억측에 가까운 일화들이 따라온다. 이를테면 성인이 유일하게 암송하는 성경 구절이 문제로 출제되었다거나, 성인보다 먼저 시험을 치른 사람들이 답변을 워낙 잘해서 기분이 좋아진 시험관이 나머지 수험생들을 모두 합격시켰다거나, 시험관의 바쁜 일정 때문에 성인 차례 바로 앞에서 시험이 취소되었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억측보다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러나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하느님의 놀라운 안배가 있지 않았을까.

임종을 앞둔 이의 수호성인, 성 요셉(축일 3월 19일)20241023113728_430669243.jpg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인 성 요셉은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 유다 지방의 베들레헴 출신이지만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 살면서 목수로 일했고, 주위 사람들로부터는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성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인은 정혼자인 마리아가 혼인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진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이를 문제 삼아 파혼하는 대신 천사의 말을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아버지로서 마리아와 함께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을 맞이했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시고 성전에 봉헌되시게 해 드렸다. 또한 헤로데 왕의 탄압을 피해 가족을 이끌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나자렛으로 돌아왔으며, 예수님이 열두 살 되시던 해에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마리아와 소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갔다가 잠시 그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성인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전에 선종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인에 대한 공경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9~10세기에 일부 지역에서 ‘주님의 양아버지’로 공경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마리아 공경과 함께 ‘마리아의 배필’에 대한 공경이 확산되었으며, 12세기경에 3월 19일이 성인의 축일로 정해졌다. 14세기에도 작은형제회를 중심으로 성인 공경이 계속되었고, 1479년부터는 성인의 축일을 가톨릭교회 전체의 축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그리고 1870년에 ‘가톨릭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데 이어 가정, 노동자, 사회정의 그리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와 단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죽음을 앞둔 이의 수호성인으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