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김포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새벽 종소리는 왠지 나를 부르는 소리 같아 가슴이 설레며 잠에서 깨곤 하였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절에 다니셨고, 가끔은 무속신앙도 믿으셨습니다. 내가 성모님을 처음 만난 것은 친구 따라 성당 마당에서 뛰놀며 아무런 의미를 모른 채 친구가 하는 대로 기도손을 했던 중학교 시절이었습니다.
결혼 후 세례를 받고 1995년 레지오 단원으로 입단하였습니다. 레지오 단원이 되었다고 기뻐하시던 시어머님의 모습과 예쁜 투피스를 선물해 주었던 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입단 1년 후 쁘레시디움 서기를 맡아 신부님 훈화 말씀을 받아적고 정리한 후 회의록에 기록하고, 전 주 회의록 낭독을 하면서 다시 한번 훈화 말씀을 기억하고…. 영성은 날로 자랐으며 신앙생활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쁘레시디움 4간부를 거쳐 2013년 꾸리아 단장에 초대되었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감당할까 고민이 되고 몹시 두려웠는데 수녀님의 격려와 선배 단원들의 조언으로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교우 가정 방문, 냉담 교우․어려움을 겪는 교우 돌봄, 본당 행사 참여 등. 특히 교중 미사 후 레지오 단원들은 커피를 끓여 성당 로비에서 신자들과 함께 마시며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니 “영화로운 동정녀 꾸리아 단원들 파이팅!”을 외치고 싶어집니다.
6년의 재임까지 무사히 마치고 평단원으로 조금은 편하게 레지오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꾸리아 간부 구성에 위기가 찾아왔고, 성모님께서는 다시 한번 저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단장 직책이 무거운 짐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가 몸이 많이 아픕니다.
갑작스러운 삶의 충격으로 성모병원에서 3개월마다 검진받고, 약을 먹고 있는데, 어쩌면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깊은 고민 끝에 다시 한번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을 청하기로 하였습니다.
건강, 의지, 고뇌….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믿기에 온전히 의탁하며 성모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성모님을 따르면 길 잃지 않고, 성모님을 부르면 실망치 않네, 성모님을 생각하니 헤매지 않고 성모님이 붙드시니 떨어질 리 없네….”
매일 아침 바치는 묵주기도는 내 일상의 첫 번째가 되었고, 평일미사 전례 안에서 때로는 뜨거운 감동으로, 때로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주님, 성모님의 보호 안에 하루하루 평온하고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다시 긴장되는 병원 검진 날, 의사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혹시 이상 증상이 나타나면 그때 방문하시면 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년 10개월의 병원 치료가 마무리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뜻밖의 결과에 굵은 감동의 눈물과 함께 분명 성모님께서 함께하셨음을 확신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모님의 전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 고향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김포에 갔다가 김포성당에 들렀더니 성당 마당에는 중학교때 처음 만났던 성모님께서 “어서 오너라, 스텔라야~” 두 팔을 벌려 나를 반겨주시는 듯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했습니다.
2024년은 본당 설립 30주년, 영화로운 동정녀 꾸리아 설립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꾸리아 설립 초기 30~40대 단원들이 이제는 나이가 들어가니 후배 단원들이 충원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기도와 활동으로 새로운 발돋움을 하면서 튼튼한 성모님의 군대로 거듭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 성모님! 당신을 진정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