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앞에 바치는 묵주기도
1571년, 비오 5세 교황님의 권고에 따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전투에 임한 그리스도교 동맹군은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군의 유럽 침공을 막아냅니다. 이날을 기려 10월 7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 제정되었고, 1883년 레오 13세 교황께서는 10월 전체를 묵주기도 성월로 정하며 묵주기도를 자주 바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고 다급할 때, 마음을 모아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던 기억이 오늘의 묵주기도 성월로 이어진 것입니다.
요즘도 신앙인들은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 앞에서 기도를 통해 힘을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결과가 언제나 승리와 성공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요. 때로는 패배와 좌절로, 때로는 하느님의 침묵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할 의욕을 잃고 낙담하기 쉽습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결과가 왜 이러냐고 하느님께 따집니다. 대체 우리는 왜 기도하는 걸까요? 그 답을 야곱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에서 찾아봅시다.
밤새 하느님과 씨름하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큰 위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형 에사오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은 화난 형을 피해 스무 해 동안 피신 생활을 하다가 귀향하는 중입니다. 에사오를 만나기 전날 밤, 야곱은 형의 보복이 두려워 아내와 자식들도 멀리 한 채 홀로 기도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나타나 동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지요. 끝내 버텨낸 야곱에게 그 누군가가 말합니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창세 32,29) 이 말을 듣고 야곱은 밤새 매달리고 씨름했던 상대가 하느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야곱은 위기 앞에서 하느님과 겨루었고, 그 결과 축복을 얻습니다.
구약에서 야곱이 하느님께 밤새 매달렸다면, 비슷한 모습을 신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니로 가십니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 여기에 앉아 있어라”(마태 26,36) 하시며 홀로 기도하십니다. 이렇게 위기를 앞두고 밤새 기도했다는 점에서 야곱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는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기도의 내용과 방향은 결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야곱의 기도 : 내가 청하는 바를 이루려는 기도
야곱의 기도는 자신의 바람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야곱은 천사에게 ‘당신이 내게 축복해 줄 때까지’”(창 32,27), 다시 말해 내가 구하는 것을 허락해 줄 때까지 당신을 보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또 자신과 씨름한 그분께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창세 32,28)라고 묻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하느님의 이름을 알려고 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분 덕을 보겠다는 말이지요. 야곱의 이런 집념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내리시지만, 당신 이름을 밝히시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기도: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께 맡기는 기도
야곱은 하느님을 자기 뜻대로 굽히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뜻이 하느님께 향하도록 몸부림칩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하는”(마태 26,41)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온 힘을 다해 기도하십니다. 참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인간이 겪는 고뇌도 모두 받아들이신 분이기에 눈앞에 다가온 수난의 고통 앞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번민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은 고통과 시련 그 이상의 뜻을 품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잔’은 거의 언제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비틀거리게 하는 술잔’을 언급합니다.(이사 51,22) 악인들은 그 잔을 “찌꺼기까지 핥아 마시리라”라고 합니다.(시편 75,9) 그리고 묵시록은 “하느님의 분노의 술을 마실 것이다. 하느님의 진노의 잔에 물을 섞지 않고 부은 술이다.”라고 말합니다.(묵시 14,10)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셔서 죄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를 대신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1베드 2,24)
이렇게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잔을 거두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시지만, 기도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고 받아들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 잔을 마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립 2,8)하셔서 아버지의 뜻에 반하려는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아담이 이기지 못했던 원죄의 유혹, 곧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창세 3,5) 되려는 유혹을 이기신 것이지요. 마치 자신이 하느님이라도 된 듯,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좌지우지하려는 교만을 이겨내신 예수님을 부활찬송은 이렇게 찬미합니다. “오,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죄를 없애셨네. 오, 복된 탓이어라! 그 탓으로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네.”
시련 가운데 기도하듯
어려움 가운데 기도할 때,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하기 위해 기도할 때, 즉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것보다 십자가를 떼어 주시도록 기도할 때, 우리는 구약의 야곱과 같습니다. 대신 신음과 피땀을 흘리며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버리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됩니다. 두 기도의 결과는 매우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예수님께는 ‘모든 이름 위에 이름’을 주십니다.(필립 2,9-11 참조)
시련 가운데 바치는 기도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자면, 야곱의 기도에서 예수님의 기도로 옮겨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욕망과 아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