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적 배경
벨기에는 유럽의 강국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에 위치하여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전쟁터가 되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으며, 주변 강대국의 속국으로 살아야 했다. 벨기에는 15세기 초에는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1516년에는 스페인의 영토로, 18세기 초에 다시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1789년 프랑스의 영토로, 1815년 네덜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다 1830년 8월 혁명으로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여 1831년에야 최초로 벨기에 왕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벨기에는 포르투갈과 비슷하게 1900년에 들어서자 노동자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사회주의 정당이 등장하여 기존 세력과 성직자 집단에 대한 공격과 사회적 혼란이 이어졌다. 이런 와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제국은 1914년 8월 벨기에를 침공하여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전쟁 중에 최소 6천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으며 추가로 1만 5천에서 2만 명가량의 민간인들이 강제 이주나 의도된 기아, 독일군에 의한 구금으로 사망한 것이다. 전쟁 후 벨기에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독일과 벨기에 사이에 중립지대를 만들고, 제1차 런던조약의 중립 보장을 확실히 하였지만 1921년 히틀러가 노동자당 당수가 되면서 다시 불안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는 1917년 11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고, 1922년 12월 러시아 주변 15개국을 묶어 소련(Soviet Union)를 결성하였으며 이후 사회 공산주의 이념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벨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연로한 알베르 1세 국왕이 그대로 왕권을 지키는 상태에서 독일의 변화에 불안해져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선에 가까워 전쟁터가 되었던 리에주와 나무르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져 가톨릭 신자들이 냉담 상태에 빠졌으며 가톨릭을 증오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또한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며 경제까지 어려워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매혹되었으며, 이에 가톨릭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하였다. 이렇게 벨기에와 가톨릭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나무르와 가까운 보랭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2) 성모님의 발현
보랭에서 성모님은 1932년 11월 29일부터 1933년 1월 3일까지 36일 동안 저녁 6시에서 10시 사이에 거의 날마다 발현하시어 당신의 모습을 33번이나 보여 주셨다. 드장브르 집안의 앙드레(14세), 질베르트(9세) 자매와 부아쟁 집안의 페르낭드(15세), 질베르트(13세), 알베르(11세) 남매 등 5명의 아이들이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11월 29일 페르낭드와 알베르는 수녀원 부속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질베르트를 데리러 가면서 이웃집 친구인 앙드레와 작은 질베르트를 불러 같이 갔다. 저녁 6시 반경 아이들이 루르드의 마사비엘 동굴을 본떠 만든 성모 동굴이 있는 수녀원 정원에 도착했다. 수녀님이 질베르트를 데리고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알베르는 우연히 고개를 돌렸는데, 수녀원 옆으로 지나가는 철도 교량 위에서 강렬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여인은 0.5m 공중에 떠서 철도 제방 위를 걸어 다녔는데 두 발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막 수녀원에 나온 질베르트도 빛나는 여인을 보게 되자 두려운 마음에 집으로 도망쳤고,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했지만 믿어 주지 않았다. 다음날 같은 시간대에 네 아이들은 평상시와 같이 질베르트를 데리러 수녀원으로 갔다가 빛나는 여인이 나타나 철도 제방 위에서 내려와 성모 동굴 쪽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2월 2일 같은 시간대에 아이들은 수녀원 정원에서 여인을 또다시 목격하였다. 여인은 20세 정도로 보였고, 미소가 아름다웠으며 오른팔에는 묵주가 들려 있고 손은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합장하고 있었다. 알베르가 “당신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십니까?”라고 묻자,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이셨다. 알베르가 다시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묻자, 여인은 처음으로 입을 열어 “항상 선해야 한단다.”라고 답하셨다. 어린이들은 이 사실을 본당 신부에게 전하였으나 신부는 어린이들이 머리로 상상한 것을 마치 정말로 보고 들은 것처럼 착각한 것이라고 여겼다.
12월 6일 성모님이 발현하신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고 많은 군중이 몰려왔다. 벨기에 언론사들이 기자를 보내 성모님 발현과 관련한 뉴스를 보도하기 시작했으며 아이들과 보랭의 주민들이 수많은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이제 벨기에 전역에서 보랭 성모님의 발현을 알게 되었다. 17일 성모님은 당신이 서 계신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순례할 수 있도록 작은 경당을 세우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으며, 21일에는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동정녀 마리아이다”라고 당신의 신분을 밝히신 다음 머지않아 마지막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9일 성모님이 당신의 두 팔을 펼치시어 가슴에서 빛줄기가 주위로 퍼져나가는 황금 성심을 보여 주셨다. 그것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었고, 그로써 성모님은 ‘황금 성심의 성모’로 불리게 되었다.
다음 해 1월 3일 성모님의 발현 마지막 날, 3만 5천 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성모님이 발현하시자 아이들은 기쁨에 넘쳐 환성을 질렸고 성모님은 아이들에게 따로 말씀해 주셨다. 먼저 앙드레에게는 “나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하늘의 여왕이다. 항상 기도하여라.” 큰 질베르트에게는 “나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겠다.” 페르낭드에게는 “너는 나를 위하여 너 자신을 희생하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황금 성심을 보여 주시고 사라지셨다.
3) 성모님의 발현 이후
성모님의 말씀대로 보랭 성지로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1933년 8월 말에는 하루에 15만 명이 순례하는 등, 1933년에만 순례자 수가 200만 명이 넘었다. 순례자의 상당수는 벨기에인들이었으며 이제 벨기에인들이 다시 가톨릭으로 회두하게 되었고 냉담했던 아이들의 부모들도 자식들의 말이 진실이라고 믿게 되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회개를 하며 다시 성당을 찾았다.
보랭은 다른 발현 성지와 마찬가지로 많은 치유 사례가 있었지만 신체적인 치유보다는 영성적인 치유와 회개의 사례가 더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나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겠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보랭의 시현자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성모님의 메시지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소명에 평생을 바치는 이전의 성모님 시현자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단 한 명도 가족과 떨어져 살지 않았으며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평범한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40년 5월 벨기에는 다시 독일에 점령당하였다. 이 같은 곤경 속에서도 샤뤼 주교는 1943년 2월 보랭 성모님에 대한 공경과 성지순례를 허락하였다. 1946년 8월 주교는 성모님이 발현한 정원에 성모상을 세워 축성하고, 1949년 7월에 보랭과 관련한 2가지 중요한 문헌을 발표하며 초자연적인 사실들의 특징들을 인정하면서 발현을 공인하였다. 성모님이 요구하신 발현 기념 경당은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서 30m 떨어진 곳에 건립되어 1954년 8월에 봉헌되었다. 1985년 5월 18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해외 순방(1985년 5월 11~21일) 중 직접 보랭 성지를 방문하셨다.
<사진 설명(위로부터)>
- 성모 발현 기념 경당 내에 모셔진 보랭 성모님 성상(좌) 성모님이 발현한 장소에 모셔진 보랭 성모님 성상. 뒤쪽으로 철도 교량이 보인다.(우)
- 성모 발현 성지 안내도. 왼쪽 아래에 점선으로 된 원이 있는 곳이 성모님이 수도원 정원에서 발현한 장소이다.
- 5명의 시현자
- 성모 발현 기념 경당. 경당의 외벽에 제단이 설치되어 있어 야외 미사를 진행할 수 있다.(좌) 성모 발현 기념 경당 내부(우)
- 보랭 성모님 성상 앞에서 기도하고 계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