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하는 이들의 수호자, 성 라우렌시오(축일 8월 10일)
3세기의 성 라우렌시오는 식스토 2세 교황을 돕던 일곱 부제 중 한 사람으로서 교회의 재산 관리, 빈민 구호, 그리고 일반적인 교회 관리 업무를 맡아 수행하는 한편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도왔다. 식스토 교황이 지하묘지 카타콤바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체포되었는데, 교황으로부터 성인 자신도 머지않아 체포되리라는 예언과도 같은 말을 듣고는 교회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로마의 집정관이 이를 알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즉시 황제에게 바치라고 명령했다.
이에 성인은 교회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려면 3일의 여유가 필요하다며 시간을 청했다. 그러고는 교회의 값비싼 기물들을 모두 처분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긴 돈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 다음 교회의 병자와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집정관을 찾아간 성인은 “이 사람들이 바로 교회의 보물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돈과 권력과 재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로마 제국과 황제를 향한 조롱이었다. 이에 분노한 집정관은 성인에게 온갖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끝내 성인을 뜨겁게 달궈진 석쇠 위로 던졌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석쇠 위에서 살이 익어가자, 성인은 “이쪽은 다 익었으니 뒤집어 주시오.”라고 말하고, 잠시 뒤에는 “이제 다 익었으니 뜯어먹으시오.”라고 말했다 한다. 끝내 뜨거운 석쇠 위에서 로마의 회개를 위해 기도한 다음 숨을 거둔 성인은 요리사들의 수호성인으로, 또한 가난한 이들과 소방관들의 수호성인으로, 그리고 로마와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빵 굽는 이들의 수호자,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축일 11월 17일)
13세기의 성녀 엘리사벳은 헝가리에서 왕의 딸로 태어났다. 4살 때 정략적 이유로 한 영주의 맏아들과 정혼한 성녀는 그 영주의 궁정에서 살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성녀는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궁정에서도 기도하며 경건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런 가운데 6살 때 어머니를 잃고 9살 때 정혼자를 잃는 시련을 겪었다. 영주는 성녀를 둘째 아들과 다시 약혼시켰고, 이런저런 어려움과 시련을 약혼자와 예비 시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극복해 낸 성녀는 14살에 21살의 약혼자와 결혼하여 서로 깊이 신뢰하며 지냈고 자녀 셋을 두었다. 성녀는 열심히 자선활동과 기도 생활을 했고, 남편은 그런 아내를 존중하고 감싸주었다.
성녀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 수도회) 회원에게 영성 지도를 받으면서 신앙적으로 더욱 성숙해졌다. 그런데 결혼 6년째 되는 해에 십자군으로 출정했던 남편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두 자녀는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성녀 자신은 지내던 곳에서 쫓겨났다. 그 뒤 성녀는 남편의 유산을 정리하여, 자녀들을 위한 몫을 뺀 나머지 재산의 상당 부분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작은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어 자선 병원을 세우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24년의 짧은 생애였지만, 왕후로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손수 음식을 가져다주고, 옷을 지어 주기를 마다하지 않은 성녀는 오늘날에도 헝가리와 독일에서, 심지어 개신교인들에게서도 공경과 사랑을 받는다. 화가들은 흔히 성녀를 망토에 장미꽃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줄 빵을 감추고 나가다가 남편에게 들켰을 때 그 빵들이 장미 송이들로 변했다는 이야기에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성녀는 빵을 만드는 이들과 빵을 판매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자선활동을 하는 이들과 기관들의 수호성인으로, 헝가리와 독일의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그리고 작은형제회 제3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머리 매만지는 이들의 수호자,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축일 11월 3일)
16~17세기의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는 페루의 리마에서 스페인계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아버지는 성인을 친자로 입적하지는 않았으나 양육과 교육에는 소홀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놀라운 신앙심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보이던 성인은 12살 때 외과 의사를 겸하는 이발사 교육을 받았고, 3년 뒤에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원으로 입회했으며, 그로부터 9년 뒤에는 도미니코회의 수사가 되었다. 성인은 수도원에서 이발사, 외과 의사, 의류 수선, 진료소 관리 등 여러 직책을 맡아서 많은 일을 감당해냈다. 또한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해 주고,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성인은 늘 기도하고 단식하는 가운데 자신을 정화하며 살았다, 또한 헌신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에게 봉사했다. ‘빗자루 수사’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남들이 꺼리는 청소 따위를 도맡아 하며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미물인 벌레조차도 사랑했고 쥐와도 친구로 지냈다.
성인은 평범한 수사로 일생을 살았지만, 선종하기 전부터 이미 살아 있는 성인으로 큰 존경을 받았다. 성인은 사생아라서, 피부 색깔이 남과 달라서 갖은 멸시를 받으면서도 잘 견뎌냈기에, 그리고 묵묵히 자신이 맡은 소임들을 해냈기에 이발사들과 미용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인종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일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옷감 염색하는 이들의 수호자, 성녀 리디아(축일 5월 20일)
성녀 리디아는 성 바오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감동해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세례를 받아 그리스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사람이다(사도 16,11-15 참조). 성 바오로는 필리피에서 유다인들이 있으리라 여겨지는 성문 밖 강가를 찾아 거기에 모여 있던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들 가운데 있던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 성녀는 성 바오로를 자신의 집에 모셨고, 성 바오로는 얼마간 그 집에서 머물며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성녀는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한 고장 중 하나인 티아티라 출신이었다. 당시 지중해 문화권에서 자색 옷감은 뿔고둥과 쇠고둥을 이용해 염색하는 최고급 옷감이었다. 성녀는 자색 옷감을 고향인 티아티라에서 들여와 필리피 일대에 파는 일을 했을 것이며, 따라서 상당한 재력을 소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성 바오로는 교우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자 물질적 도움을 받지 않고 손수 천막 짜는 일 등을 해서 생활과 선교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했다. 그런데 필리피 신자들의 물질적 도움만큼은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필리 4,10-20 참조). 그리고 성 바오로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필리피 공동체의 중심에는 성녀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성녀는 성덕과 공로로 일찍부터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정교회에서도 공경을 받아 왔으며, 특별히 직업 때문에 염색공들과 염색업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