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주변 친구들이 글라라, 헬레나, 안나, 마리아 등 내 이름과는 다르게 부르며 놀곤 했는데 나만 숙희라 불렸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야 그 친구들의 원래 이름이 명자, 명순, 경옥, 순복이여서 어머니께 친구들 이름은 왜 두 개냐고 했더니 그 친구들은 성당에서 세례받아 세례명이 있다고 하셨다. 나는 왜 세례를 받지 않았느냐고 속상해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노안성당 내 성골롬바노중학교에 입학하여 학교에서 매주 토요일 1시간씩 교리를 3년간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세례를 받을 수 없었는데, 그 당시 부모님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허전하고 슬펐던 마음을 뒤로하고 타지로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마산에 있는 양덕성당을 스스로 찾아가 1977년에 세례를 받았는데 주님의 사랑을 온통 차지한 것 같았다.
1978년 견진성사를 받고 청년회의 성가대 활동과 청년 레지오에 입단해서 5년여간 병원 방문 활동을 하던 중 고향의 아버지께서 급성 맹장염으로 급히 한 수술이 잘못되어 큰 병원으로 옮겼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퇴원하셨다. 그 뒤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소식에 집으로 달려와 아버지께서 대세를 받으시도록 노안성당에 연락했다. 즉시 신부님과 수녀님이 오셔서 대세를 주시면서 아버지께 “십자가의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으시니 아버지는 고상을 당신 품으로 감싸안으시며 응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 품으로 가셨다. 노안성당에서 장례의 모든 절차를 다해 주신 일을 계기로 어머니는 동생 3명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언니와 여동생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례를 받아 성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다 고향으로 와 신동성당에서 초등부 교리교사를 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중 중매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의 친가는 토속신앙이었는데 중매하신 분이 동곡공소 회장님이셨기에 신동성당에서 1980년 혼배 결혼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농촌에서 시부모님, 시조부님, 시동생 등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힘든 농사일을 하며 딸 둘을 낳았고, 늘어나는 농사일과 양육으로 마음과는 달리 2년 넘게 냉담했다. 주님을 뵈러 가지 않으니 육신은 편해도 마음은 무거웠다.
냉담 풀고 시부모님도 주님께 이끌어
그 사이 공소가 신동성당으로 귀속되는 것을 계기로 주님께 향하는 마음을 다잡고 어린 딸들과 주일 특전미사를 매주 참례했다. 셋째딸이 태어났고, 논농사만으로는 소득이 한계가 있어 비닐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다. 늘어난 농사와 양육으로 육신은 힘들었지만 주님께 향하는 열정으로 미사참례를 하는 나와 자녀들이 힘들어 보였는지 남편이 바쁜 중에도 트럭으로 기꺼이 기사 노릇을 해줘 토요 특전미사를 거르지 않고 참례할 수 있었다.
그즈음 본당에서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반모임을 하게 되었는데 반장으로 바빴지만 저녁시간이어서 가능했고, 그때마다 어린 딸들을 데리고 다녔다. 넷째딸이 태어났고 큰며느리로 거듭 딸 넷을 낳으니 시부모님의 크신 걱정 속에서도 주님께 의탁하며 많아진 농사일과 성당 활동을 묵묵히 해 나갔다. 남편에게 성당에 나가기를 권유하면 바쁜 농사일로 쉽게 응하지 않았고, 더 나이 들면 나가겠노라 하면서 고맙게도 내가 활동할 수 있게 배려와 협조해 주었다.
다섯째를 낳았는데 시부모님께서 그토록 기다리셨던 아들이었다. 그동안 딸들이 넷이나 되니 아들을 주시면 며느리 도리를 다할 것 같아 주님께 간청했었는데 주님께서 주신 선물에 시부모님의 암묵적인 시집살이에서 해방되었다. 자녀들은 모두 유아세례와 첫영성체를 하고 초등부 교리를 위해 먼 거리를 버스 타고 다녔는데 어려서부터 주님 사랑을 알고 산다면 본성도 바르리라는 믿음이 있었고,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의 이런 가르침을 잘 따라주었다.
건강하시던 시아버님께서 완치되기 어려운 병에 걸리셨다. 시부모님께 성당에 가시자고 기도와 함께 여러 번 간곡히 권유하니 망설이셨지만 입교하신 후 한 번도 교리에 빠지지 않으셨고, 주일미사도 꼭 참례하시면서 하느님께 의탁하셨다. 시아버님은 환자이셨지만 마음을 편하게 가지셔서인지 생각보다 병환을 잘 이겨내시면서 손주들을 돌봐주시기도 하셨다.
몇 년 후 병원에 입퇴원을 수 차례 하셨는데 수시로 기도해 드리면 “네가 기도해 주니 기분이 좋다” 하시며 환하게 웃곤 하셨다. 결국 병세를 못 이기시고 집으로 오신 아버님의 손을 잡고 선종기도를 해드렸는데 편안하게 하느님 곁으로 가셨다.
바쁜 시간 쪼개가며 성가대와 레지오에서 활동
어느날 신부님께서 성가대 단원 모집을 하셨는데 청년회 활동할 때 성가대에서 성가를 부르던 때가 그리워 성가대에 들어갔다. 몸은 힘들었지만 평일 저녁에 하는 성가 연습과 주일에 성가로 주님을 찬미하는 시간이 은총으로 다가와 가슴 벅차도록 기뻤다. 비슷한 시기에 저녁 시간에 회합하는 모든 성인의 모후 Pr.에 입단했다. 생활은 더 바빠졌지만 시간을 이리저리 쪼개어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그즈음 시어머님이 심혈관질환으로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가셨지만 그만 주님 품으로 가셨다. 시부모님을 주님의 자녀로 인도했음에 위안을 하며 두 분의 기일과 명절이면 온 가족이 연도를 바치고 연미사를 드리고 있다.
입단한 Pr.에서 단장직을 맡고 있었을 때 뜻밖에 신부님과의 면담으로 갑자기 꾸리아 단장직을 맡게 되었다. 본당 사목회의 구역분과에서 5년여간 봉사하고 있던 터라 갈등이 있었지만 순명했다. 꾸리아 단장을 맡은 얼마 뒤 코로나로 회합과 월례회의를 비대면으로 하게 되었고, 전 단원들의 역할을 고심하며 정체되지 않도록 메신저로 대체하면서 유지해 왔다. 다시 대면으로 회합과 월례회의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너무나 감사했고, 코로나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소중함에 꾸리아 간부들과 고심하고 협력하던 중 2024년 1월에 우리가 속했던 상급 꼬미씨움이 본당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갑자기 몇 개의 꾸리아가 직속으로 있는 꼬미씨움으로 승격되니 부족한 게 많았다. 성모님의 전구로 주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기도와 상급평의회인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Se. 단장님 및 간부들의 관심과 조언으로 지난 1월에 첫 꼬미씨움 월례회의를 했고 4월에는 Se.에서 종합보고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을 계기로 우리 꼬미씨움 4간부는 더욱 협력하며 레지오 단원들이 성모님의 군단으로 굳건히 정착하고 발돋움하도록 기도와 활동으로 노력하고 있다.
신앙생활을 뒤돌아보니 친정 부모님, 시부모님, 시댁과 친정의 형제자매, 아들딸들이 주님의 자녀가 되는데 나를 도구로 써주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는 예전부터 나이 들면 입교하겠노라 던 남편이 지금 충분히 나이가 들었으니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도록 기도하며 이끌 일이 남아있다. 그동안 나를 주님의 자녀로 살도록 묵묵히 뒷바라지해 준 고마움을 갚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성모님의 은총이었음을 고백하며 힘닿는 데까지 레지오 단원으로서 기도와 활동으로 힘차게 나아가련다.
<사진설명(위로부터)>
- 레지오 도입 70주년 기념 행사에서 봉사 단원들과
- 올해 본당 성모의 밤 행사 후 신부님,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좌) 신동성당 꼬미씨움 간부들과 함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