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모든 성인들 가운데 가장 공경 받는 분은 단연코 성모님입니다. 전례력 안에 성모님의 대축일과 축일, 기념일만 도합 열아홉 번 있으니, 다른 성인들과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교회는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내면서 그 어떤 성인도 누리지 못한 공경을 성모님께 드립니다.
성경에는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하늘로 승천한 이들의 기록이 있긴 합니다만, 교회가 믿을 교리로 승천을 선포한 성인은 오직 성모님뿐입니다. 1950년 11월 1일, 당시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서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진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물론 성모 승천이 현대에 새롭게 만들어낸 교리는 아닙니다. 예로부터 신앙인들은 성모님의 승천을 믿었습니다. 4~5세기경 저술된 예루살렘의 디모테오 설교 사본이나, 8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제르마노의 작품 등이 그런 믿음을 증언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호칭들
이렇게 마리아가 지극한 공경을 받으시는 분이니, 그분의 생애와 덕을 기리는 세례명들도 많고 영명 축일도 많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고 세례명으로 삼은 것은, 그분을 그만큼 큰 모범으로 여겨왔다는 뜻이겠지요. 여기서 성모님의 다양한 이름들을 알아볼까요?
먼저 성모님을 꽃에 견주어 부르는 이름들을 보면, 빼어난 자태와 향기를 자랑하는 장미처럼 아름답다는 뜻으로 ‘로즈마리’(축일 5월 31일)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로사’나 ‘마리로사’도 같은 뜻입니다. 또 순결하고 고귀한 이미지의 백합에 빗대어 ‘릴리안’(12월 8일)이라고도 부릅니다. 12월 8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지요. 원죄에 물들지 않은 성모님을 표현하는데 백합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바다의 별’, ‘스텔라’(8월 15일)도 성모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 두 이름은 성모님의 이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성모님은 유태인이시니, 당시 유태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미리암’이라 불렸을 것입니다. 미리암은 ‘별’이라는 뜻이지요. 이 ‘미리암’을 뜻에 따라 라틴어로 옮기면 ‘스텔라’가 되고, 소리에 따라 번역하면 ‘마리아’가 됩니다. 라틴어 단어 ‘마리아’의 뜻은 ‘바다’입니다. 그래서 라틴어와 헬라어, 히브리어를 함께 접했던 옛 신앙인들은 성모님의 이름에서 바다와 별의 이미지를 함께 떠올리며 그분을 바다의 별(스텔라 마리스)라고 자연스럽게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북극성 같은 별을 길잡이로 삼아 용감하게 파도를 헤치며 항해하던 옛사람들에게, ‘바다의 별’ 마리아를 바라보며 신앙의 길을 찾고 용기와 희망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밖에 묵주의 성모 마리아를 일컫는 ‘로사리아’(10월 7일), 하늘의 여왕이시라는 뜻의 ‘첼리나’ 혹은 ‘레지나’(8월 22일)도 그분의 애칭입니다. 성모 탄생을 기념한 세례명 ‘나탈리아’(9월 8일), 성모님께 전해진 예수님 탄생 예고를 뜻하는 ‘안눈치아따’(3월 25일),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기념하는 ‘임마꼴라따’(12월 8일), 성모님의 고통을 뜻하는 ‘돌로로사’(9월 15일), 가르멜 산의 동정 성모님을 일컫는 ‘가르멜라’(7월 16일)도 모두 성모 마리아님께 기원을 둔 이름들입니다.
마리아의 모범
신앙의 선조들이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성모님을 부르면서 그분이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을 따르려 했다면,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성모님의 모범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 봅니다.
우선 성모님은 대화하는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성모님의 순명은 결코 말 없는 복종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루카복음서에 실린 예수님 탄생 예고 장면(루카 1,26-38)을 볼까요?
대천사 가브리엘이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구세주를 낳으리라는 엄청난 소식을 전했을 때, 마리아는 그저 ‘예’하고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당돌하리만치 분명하게 자기 생각을 밝힙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며, 엘리사벳의 잉태를 예로 들면서 마리아의 불안과 의구심을 달래 줍니다. 그제야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며 믿음의 순종을 실천하지요.
우리 신앙은 아무 생각 없는 받아들임과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대천사도 어린 시골 처녀 마리아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고, 마리아 또한 대천사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기 생각을 밝혔습니다. 신앙의 순명은 이렇듯 대화를 전제합니다.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대화하고 인내로 기다리는 시간은 참다운 순명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대화 없는 순종은 굴종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성모님은 경청하는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고 목동들이 찾아와 천사들의 말을 전했을 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합니다. 인생에는 무릇 대화로도 해결되지 않는 수수께끼와 신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충분히 대화를 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과 받아들이기 힘든 어려움이 있을 때, 마리아는 자기 잣대로 쉽게 판단하는 대신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선택을 했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반발하고 튕겨내는 세태 속에, 설령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한 걸음 물러나서 마음을 다잡는 마리아의 모습은 경청을 통해서 영성의 깊이를 더하는 신앙인의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빙빙 돌려가며 대화와 경청의 미덕을 말씀드리는 까닭은, 지금 전 세계 교회가 나아가고 있는 ‘시노드적인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뜻입니다. 시노드, 그러니까 ‘함께 가는 길’은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요 삶의 방식입니다. 전 세계 가톨릭 신앙인들은 지난 3년간 서로 대화하고 서로를 통해 성령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시노드의 과정을 밟아왔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대화와 경청을 강조하는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 2차 회기가 마무리되는 해입니다.
시노달리타스, 그러니까 시노드 정신이 우리 안에 온전히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일상에서부터 대화하고 경청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모범을 통해서 신앙이 결코 억압과 굴종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