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죽림굴(대재공소)은 기해박해를 피해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과 간월의 교우들이 좀 더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한 천연 석굴이다. 한국판 ‘카타콤바’라고도 하는데 ‘카타콤바’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지하무덤이지만 박해 때는 피난처이자 전례 공간이었다.
매주 금요일 오전 11시에 드리는 미사에 참석하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 3.4km를 올라가야 하는 힘든 길이지만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걸어서 사목했다는 길을 기도하며 걷는다. 그리고 원로사제 김영곤 시몬 신부님의 ‘죽림굴 발견기’를 옮겨본다.
죽림굴 발견기
언양 일원을 돌아다니며 신앙의 흔적들을 찾았다. 부산교구 설정 10주년 기념으로 출판한 김구정 선생의 ‘천주교경남발전사’(1967년 6월 발행)를 읽어보니 “언양 고을 깊은 산중에 대재(죽령)란 신자 부락으로 피신하였다.” “수십 명이 거처할 수 있는 석굴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몇 번을 읽어도 무심하게 그런가 보다 하며 지나쳤던 구절들이 갑자기 내 마음에 다가왔다. 석굴이라!? 석굴에 대해 수소문하였다.
조말줄 요셉 회장은 나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나는 ‘아다망스’에 대한 이야기고, 또 하나는 간월산 중턱에 ‘소쿠리굴’로 알려진 석굴이 있다는 것이다. 김영제 요한 신부가 소신학교 시절에 간월산 어딘가에서 주운 예쁜 돌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프랑스 신부가 그 돌을 보고 ‘아다망스’라 부르며, 그 돌이 있는 곳에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단다. 김 신부가 언양성당 주임신부로 1956년 4월에 부임해서 당시 청년인 조 요셉을 데리고 산의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1986년 2월 부임 이후 봄부터 나 역시, 골짜기가 세 개 겹쳐 있고, 개울이 흐르고, 나무다리가 있던 곳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등억리 골짜기를 여러 차례 ‘아다망스’를 찾으려 헤매며 돌아다녔다. 아마도 성모님의 도움이 없이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해 10월 하순경, 소쿠리굴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조 요셉 회장을 길잡이로 하여 10여 명으로 탐사단을 구성하였다. 왠지 찾아가는 길이 힘들다. (중략) 결국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석굴은 찾을 수 없었다. 11월 초순, 2차 탐사단을 남자 신자들로만 구성하여 출발시켰다. 늦은 오후에 돌아온 그들은 굴의 위치를 찾았다고 보고했다. 11월 중순, 현장 확인을 위해 다시 간월산을 올라갔다. 간월재에서 서쪽으로 20분 정도 내려가는 곳에 ‘소쿠리굴(석굴)’이 있다. 간월재는 어른 키 높이만큼 자란 억새풀이 누렇게 펼쳐져 있다. 좁은 등산로는 길의 흔적만 있고, 한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다.
등산로 오른쪽으로 경사지게 5m 높이에 석굴이 있고 왼쪽 경사면 아래에서는 물소리가 난다. 석굴 입구는 나무와 풀로 가려져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들어가는 곳의 높이는 약 80~90cm, 가로 넓이는 약 3m다. 허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서니 2m 되는 지점에 높이 약 30~40cm, 가로 넓이 약 2m, 세로 길이 약 1m의 작은 바위가 놓여 있다. 작은 바위 뒤로 약 1m 높이에 굴의 바닥이 있으며 그 위에 올라서서야 허리를 폈다. 70~80여 명이 앉거나 설 수 있는 공간이다. 왼쪽 벽면과 나란히 하여 나무 구유가 썩어 있으며, 괭이들은 파편처럼 그 자리에 있다. 뒤편 안쪽으로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길쭉한 공간이 약 3~4m 길이로 보인다. 그 속에 길이 1m, 구경이 3~4cm 되는 나무막대가 있다. 굴 밖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바위 언덕 전체가 소쿠리를 엎어 놓은 형상이다.
석굴 밑 등산로 아래 골짜기로 12~13m 가파르게 내려가니 3~4명이 목욕을 할 수 있을 만큼 물이 고여 흐른다. 물속에서는 1급수에만 산다는 ‘중택이’들이 여유롭게 놀고 있다. 굴 주변에는 산죽들이 많이 흩어져 자라고 있으며, 숯 굽은 터들이 군데군데 있다. 등산로를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다 파래소 폭포로 가는 갈림길에서 다시 동쪽으로 물길을 따라 올라가니, 약간 넓은 평지가 있으며 거기에 집터의 흔적들이 있다. 적어도 7~8가구는 있었음 직해 보인다. 아마도 신자들이 여기에 주로 기거하며 위급 시 ‘소쿠리굴’을 피난 석굴로 이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을 대재(죽령)라 부르는 곳으로 추정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라틴어로 쓴 서한이 1988년 초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천 리 길 백 개 공소를 다닌 최양업 신부는 “저의 관할 구역이 넓어서 무려 5개 도에 걸쳐 있고, 또 공소가 100개가 넘습니다.”고 말한다. 서한 세 곳에서 간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불무골과 안곡에서 보낸 두 편의 서한에는 간월 교우촌의 이야기가 나온다. 세 번째로 1860년 9월 3일 죽림에서 보낸 서한이 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얼마간 머물며 서한을 발송한 죽림은 언양지방 사람들이 소쿠리굴이라 부르는 ‘죽림굴’(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이다. 간월재를 사이에 두고 이천리에는 ‘죽림굴’과 함께 대재공소가 있고, 등억리에는 김 아가다 묘와 함께 간월공소가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깊고 험한 산속으로 들어간 신앙의 선조들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만 의지한 삶을 살았다.
1987년 11월에 ‘죽림굴’ 발견 1주년 기념미사를 굴속에서 언양성당 신자들과 함께 봉헌했다. 1988년 9월 순교자성월을 맞이하여 ‘죽림굴’ 발견 2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며 가톨릭 신문에 ‘죽림굴 발견’을 공식으로 발표하였다.
‘아다망스’를 찾으며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이라는 허황된 망상에 가슴 뛰며 꿈을 만들었던 것이, 도리어 피와 땀으로 얼룩진 ‘죽림굴’이라는 신앙의 현장을 찾아내게 하였다. ‘죽림굴’의 발견은 돌로 된 보물이 아니라 신앙의 보물을 건져 올리는 광산의 입구가 되었고, 은총의 우물에서 은총의 물을 기르는 두레박이 되었다. ‘죽림굴’을 통해 신앙의 보물을 발견하였듯이, 우리 생활 속에는 하느님의 보물이 있고 그것을 발견할 단서와 확신할 문건이 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기억하며
지금 전국적으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신부님이 다녀가셨던 30곳을 도보순례 하는데 우리 부산교구는 죽림굴이 그곳이다. 죽림굴 가는 길은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서 ‘죽림굴, 신불산 자연휴양림’ 표지판이 보이면 주차(주차비 5000원)한 후 올라가면 왕복 3시간이 소요된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기원하면서 묵주기도를 하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3월 1일 시작된 미사는 6월 28일 끝나고 9월 6일부터 다시 시작된다.)
<사진설명(위로부터)>
- 죽림굴 입구
- 원로사제 김영곤 시몬 신부님 주례 미사(좌) 미사 참석 후(우)
- 죽림굴 올라가는 입구(좌) 죽림굴 표지석(우)
- 가톨릭신문에 나온 죽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