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속에서도 고구마가 자리 잡아가는 것이 얼마나 기특한지 듬성듬성 비어 있어도 감사하기만 하다. 어렵게 자리 잡은 고구마 순이 뽑힐까 봐 작은 풀들을 그냥 뒀더니, 지나가는 소나기에도 어느새 너무 장성해져서 고구마보다 더 올라왔다. 고구마들이 제발 도와달라고 아우성이다.
우리는 지구의 울부짖음과 피조물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한다고, 들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하곤 한다. 그런데 이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도록 청하기 전에 한 번쯤 먼저 생각해야 한다. 만약 듣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듣게 될 것이고, 들리기 시작하면 그들과 함께할 마음으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를 다 아신다. 그런데 그분께 드리는 청에 대하여 그분이 모르실 리 없고, 안 들어주실 분이 아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면 그 뒤에 따라오는 상황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 지난 2004년의 일이 떠오른다. 꼭 2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이다.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사고를 당했는데 병원에서는 생존율이 5%밖에 안 된다고 하였다. 열흘째 되었을 때, 의사 선생님은 이제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아직 믿기지 않았지만, 올케언니에게 상황을 이해시키고, 준비하자고 했다. 언니는 아니라고 부인하며,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오빠에게 “하은이 아빠, 일어날 거지? 이겨낼 수 있지? 괜찮아, 조금만 더 힘내봐”라고 울며 이야기하였다. 안타깝게도 오빠는 숨만 쉴 뿐이었다.
그날 수녀원으로 돌아오며, 나는 나도 모르게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오빠를 살려주시고 차라리 저를 데려가 주세요. 저는 무엇이든지 감수하겠습니다. 오빠를 다시 살려주세요. 이제 당신께서 하실 차례입니다.”라고 기도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께서 오빠에게 심폐소생술을 하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조건도 없으시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하느님을 알지만, 나도 모르게 나를 봉헌하고 청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나는 올케언니와 함께 중환자실로 향했다. 언니는 오빠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그런데 아주 짧은 순간 오빠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잘못 봤나 싶어서 오빠를 부르며 다시 반응해달라고 했다. 어렵지만 다시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순간 나와 올케언니는 중환자실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을 불러 오빠를 보여주었다. 의사 선생님이 “기적이네요. 살아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중환자실의 다른 보호자들과 간호사 선생님들과 우리는 놀랍고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눈물을 흘렸다.
세상 끝 날까지 돌볼 책임감으로 그들의 소리를 들어야
이후로 나는 내 앞에 그 어떤 어려운 일들이 있어도 묵묵히 감당하며 살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일, 나빠 보이는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기준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기도를 들어 주시는 주님께 나를 기꺼이 드리는 것과 주님 곁에서 그분의 일을 거들 짝으로서 그분과 함께 모든 일을 감수하는 것이 중요했다. 내 앞에 새롭게 감당해야 할 길로 향하는 문이 열려서 들어가면, 그 길에서 다시 또 다른 문이 열리곤 하였다. 나는 그저 열어주시는 문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신비로운 것은,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살려달라고 청했던 기도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성경에서 예리코의 소경 바르티메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29).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라고 물으셨다. 소경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루카 18,41)라고 대답한다. 소경은 자신이 청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은 보기 전과 볼 수 있게 된 후의 삶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살던 태도에서 주도적인 태도로 바꾼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구 공동의 집 위기 앞에서 모두 함께 기도하고 있다. “주님, 살려주세요.” 우리 자신만을 살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 “지구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게 되면 우리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새로운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일회적인 봉사가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돌볼 책임감으로 그들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러면 표면적인 예쁨 너머의 참된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