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혼인 청첩장을 받았다. 그 속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어느 외국 영화의 대사를 인용하여 두 사람의 사랑을 고백한 내용이다. 좋은 글이지만 객쩍었다. 두 사람 모두 신앙인이건만 어느 곳에서도 신앙인의 향기가 맡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은총과 기도와 거룩함과 영적 도움을 뜻하는 그 어떤 ‘용어’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저 속된 세상의 식상한 단어와 문장으로 꾸며졌을 뿐이다. 그들이 조금만 노력했다면, ‘성경’ 안에서도 인용할 좋은 글귀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신앙인들에게서 좀 더 특별한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은 나만의 욕심인가? 많이 아쉬웠다.
몇 개월 전에 이웃 본당 신부로부터 문의 전화를 받았다. 웬 젊은이들이, 둘 다 신앙인이 아닌데 성당에서 혼인하고 싶다는데 그 청을 들어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굉장히 좋은 기회라고 답해 주었다. 그들에게 가톨릭의 혼인관을 알려주고 간접적인 선교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몇 주 지난 뒤, 그 결과를 들었다. 두 사람 모두 신앙을 갖길 원한단다. 물론 그 사제가 주례까지 서 주었기에, 인사치레의 반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선했다. 한없이 천박한 자본주의 혼인 풍속이 만연된 요즘이기에 그렇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미세먼지처럼 혼탁함이 느껴져 답답할 때가 많다. 그래서 이 청춘들의 해맑은 용기가 마치 청량음료같이 시원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혼인을 청하는 젊은이들이 성당에서 혼인예식을 하고 일반 예식장에서 또 혼인하고자 할 때, 망설이지 않는다. 주례를 두 번 서는 셈이다. 원래 교회법에서는 혼인서약을 다른 장소에서 반복하는 것을 금한다. 그것을 반복함으로 참된 의미의 거룩함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두 번 한다. 비신앙인들의 혼인예식장 접근성을 높이기 위하여, 일반 예식장의 편리함과 유용함이 좋아서, 기타 등등의 이유가 있다. 마냥 교회법을 들어 반대할 수도 없고, 반대해도 듣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참된 혼인식은 성당에서 사제 앞에서 하는 것이고, 일반 예식장에서 하는 것은 혼인 갱신식이나 혼인 축하 예식 정도로 여기자는 것이다. 한편, 내게는 일반 예식장의 비신앙인들 앞에서, 가톨릭의 혼인관을 소개할 선교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욕심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들의 혼인에 대해 책임지는 사목적 서비스 정신도 한몫한다.
혼인은 ‘혼인서약’이 합법적이며 유효하게 교환되어야
일반 예식장의 혼인예식에 대해 말해보자. 요즘 젊은이들은 나름 특별한 방식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른바 ‘스몰 웨딩’, ‘주례 없는 혼인식’, ‘신랑 신부 함께 입장하기’ 등이다. 선택하는 예식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발 부탁이다. 변화를 시도하기 전에, 왜 혼인예식을 하는지, 무엇이 혼인을 유효하고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숙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코믹하고 가벼운 ‘쇼’ 수준으로 전락할 수 있다. 가족과 친지 그리고 주변의 어른들과 친구들을 불러놓고 ‘시시한 장난질’로 혼인의 거룩함을 스스로 훼손하질 않길 바란다.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혼인하는 이유는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다. 산속에 들어가 몇몇이 모여 비밀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혼인은 모름지기 떠들썩해야 한다. 오늘부터 ‘품절남녀’가 된다고 동네방네 광고하는 것이다. 즉, 내 곁의 배우자에 대한 육체적 독점권은 오로지 나에게 있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리고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청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거룩한 울타리가 되어 부족한 저희가 꾸밀 가정을 온전히 보호해 주십시오.”
그리고 강조하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다. ‘혼인서약’의 중요성이다. 혼인이 합법적이고 유효하게 체결되기 위해서는 ‘혼인서약’이 합법적이며 유효하게 교환되어야 한다. 이것만 있으면, 반지의 교환 없어도 혼인은 유효하게 체결된다. 그러면 혼인서약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교회가 가르치는 혼인서약은 이렇다. “나는 당신을 배우자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나는 혼인의 당사자들이 이것을 외워서 큰 소리로 발표하길 바란다. 가끔, 혼인서약 대신 신랑신부가 서로 사랑의 편지를 교환하는 것도 보았다. 그 가볍고 말랑말랑한 내용의 편지글로 이 서약을 대신할 수는 없다. 편지 형식을 고집하고 싶다면, 그 편지글에 이 서약의 내용을 다 담아 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혼인서약’은 엄숙하고 장중하게 그리고 남김없이 선포되고 수용되어야 한다. 혼인의 당사자들 모두가 그 중량감을 충분히 느끼길 바란다. 이것 없이는 참 허무한 가짜 결혼식이 된다.
‘혼인서약’의 최고의 장소는 ‘성당’
혼인서약의 성격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혼인은 세상의 거의 모든 문화권의 종교시설에서 이루어진다. 그 예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녀의 역할과 가정의 숭고한 의미 그리고 그 사회의 도덕적 기준과 궁극적 지향점까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혼인을 ‘거룩한 예식’으로 설명한다. 거기에서 주고받는 ‘혼인서약’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신의(信義)’를 지키며 그 내용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늘 변하는 인간, 유한한 인간, 불완전한 인간이 하느님의 속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혼인서약’이다. 그것이 변하면 안 되는 것이기에, 영원히 변함없는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혼인서약’을 ‘사랑’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의 성격을 지닌다. 그래야만 혼인의 안정성이 확보되고, 그래야만 몸과 마음을 온전히 혼인생활에 투신할 수 있게 된다. 그 사랑이 변한다면, 정말 재미없어진다. 죽음을 맹세하며 약속한 사랑이 덜 여문 젊은이의 흰소리로 밝혀진다면, 그 혼인은 위태로워진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배우자 서로가 상대에게 전인적인 투신을 요청하겠는가?
이렇게 혼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속성과 닮아있다. 이 같은 ‘혼인서약’의 최고의 장소는 ‘성당’이다. 호텔 예식장, 아름다운 정원의 잔디밭 위에서의 혼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성당’ 이외의 장소는 축하 파티 장소로 이용하시라. 혼인예식은 그 자체가 지닌 성스러움과 엄숙함이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성당’에서 하시라. 그곳이 최고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멀쩡한 성당 놔두고 그 앞마당 잔디정원에 테이블 가져다 놓고 미사 드리며 혼인예식을 거행하는 경우도 보았다. 그 불편함과 떨어진 격(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호텔 예식장도 마찬가지다. 그 세속적 찬란함과 천박함에 대해 더 이상 논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