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포르투갈 파티마(1917년)②
최하경 대건안드레아 서울대교구 도곡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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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모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비밀
성모님은 7월 13일 파티마에서 세 번째로 발현하셔서 세 아이에게 세 가지 비밀 메시지를 말씀하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비밀은 교회의 요청에 따라 루치아가 1941년 8월에서야 자신의 회고록에 기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세 번째 비밀은 루치아에 의해 문서로 작성되어 밀봉된 다음 교황청에 보내졌으며 오랫동안 교황만 열람하고 일반에게 20240722164518_1751077704.jpg공개되지 않았다. 2000년 5월 1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파티마를 순방하셨을 때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 왔던 파티마의 세 번째 비밀을 공개하였다.
첫 번째 비밀
많은 영혼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평화가 오며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다는 예언으로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비밀
만일 사람들이 여전히 하느님을 거역하며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음 교황(비오 11세)때 더 나쁜 일(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다는 예언으로, 실제로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러시아가 그 잘못된 사상을 세상에 퍼뜨려 전쟁을 일으키고 교회를 박해할 것이며 많은 나라가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최후에는 나의 성심이 승리할 것이고 교황은 러시아를 나에게 봉헌할 것이다. 러시아가 회심한다는 예언은 1952년 교황 비오 12세가 러시아를 성모님께 봉헌하고, 1991년 가톨릭을 오랫동안 박해하였던 러시아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성모님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세 번째 비밀
교황에 대한 저격을 예언한 것으로, 실제로 1981년 5월 13일(파티마 성모 첫 번째 발현 일자)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피격받았다. 교황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것이 모두 성모님 덕분이라고 했으며, 다음 해 5월 13일 성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 위하여 파티마를 순방하셨다. 교황은 2000년 5월 13일 파티마를 순방하면서 세 번째 비밀을 공개하고 프란치스코와 히야친다 남매를 시복하셨다. 교황은 1982년(성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 1991년(러시아의 붕괴), 2000년 5월 13일(세 번째 비밀) 등 파티마를 세 차례나 순방하셨다.

2) 시현자
시현자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다는 친척 관계로 집도 서로 가까운 곳에 있고, 나이도 비슷하여 양 떼를 돌보며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여섯 차례의 성모님 발현에 함께했으며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희생을 바치라는 성모님의 지시에 따라 세 아이는 하루 종일 굵은 밧줄로 허리를 묶었고, 더운 날에 물도 마시지 않으며, 점심을 굶고 묵주기도를 바쳤다. 성모님의 말씀대로 프란치스코는 성모 발현 2년 후 스페인 독감으로, 히야친다는 3년 후 독감과 합병증으로 선종하였다. 
발현을 목격한 이후 루치아는 어머니와 언니로부터 많은 구박을 받았다. 어머니는 관심을 끌기 위해서 루치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사실을 말하라고 하며 때리기까지 했다. 또한 이웃은 군중들이 몰려오면서 밭이 다 망가지고 농사를 망쳤다고 손해배상까지 요구했다. 시현자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루치아는 시현자들이 늘 받아 왔던 모욕과 고통을 혼자 짊어져야만 했다. 10월 13일 태양의 기적으로 성모님의 발현이 받아들여지면서 루치아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뻔뻔스러운 부탁과 똑같은 질문과 무례한 말들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새로 부임한 주교는 루치아를 1921년 수녀회의 기숙학교로 보냈다. 루치아는 그때부터 1934년 종신서원을 할 때까지 13년 동안 가족과 헤어져 조용히 지냈다. 그녀는 1935년 12월 첫 회고록을 시작으로 1993년까지 여섯 권의 회고록을 남겼고, 코임브라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서 2005년 98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프란치스코와 히야친다는 2017년 5월 13일 파티마를 순방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루치아는 2023년 6월 가경자로 선포되어 시복시성에 다가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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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모님의 발현 이후
20240722164629_1142766289.jpg성모님이 파티마에서 보여주신 태양의 기적은 가는 곳마다 화제가 되었고, 포르투갈 국민들은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민중운동을 일으켰다. 1920년 5월 13일 최초의 파티마 성모상 축성식이 거행되었을 때 이를 저지하려고 동원된 군대가 순례자와 군중에게 밀려나는 일까지 벌어졌으며, 1922년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6만 명의 순례단이 벌인 국민 시위운동도 성공리에 끝났다. 그리고 포르투갈 가톨릭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던 제1공화정도 1926년 5월 28일 군사 쿠데타로 사라졌다. 1929년 5월 포르투갈의 새로운 대통령은 파티마를 순례하고 포르투갈 전 국민과 정부를 묵주기도의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1920년 레이리아 교구로 부임한 주교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발현을 조사한 후 1930년 10월 13일(여섯 번째 마지막 발현 일자)에 10만 명이 넘는 순례자 앞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공인하였다. 같은 해 파티마의 순례자에게 교황의 대사(大赦)가 주어지면서 파티마 성모님에 대한 공경이 전 세계로 확산하였다. 그리고 1940년 포르투갈과 로마 교황청이 우호조약을 맺으며 드디어 포르투갈 가톨릭은 당당하게 복원되었다. 해마다 수백만 명의 순례객이 파티마를 방문하면서 파티마는 프랑스의 루르드, 멕시코의 과달루페와 함께 세계 3대 성모 발현 성지로 인정받게 되었다.

4) 파티마의 유래
12세기 포르투갈의 곤살로 성주는 국토 회복을 위하여 이슬람과 전쟁을 하던 중 이슬람 공주인 파티마를 우연히 포로로 잡게 되었다. 이슬람 군사들에 의해 파티마 공주는 다시 이슬람 진영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곤살로 성주는 끝까지 추격하여 파티마 공주를 다시 포로로 잡았고, 이 과정에서 성주는 공주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성주는 국왕에게 승리의 대가로 파티마 공주와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국왕은 ‘파티마 공주가 자진하여 가톨릭 신자가 되고, 성주에게 사랑을 표시한다면 결혼을 허가하겠다’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리하여 공주는 세례를 받았고 우레아나라는 이름으로 성주의 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결혼 1년 만에 공주는 세상을 떠났고 낙담한 성주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수도원 원장은 작은 마을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여 곤살로를 수사 중의 한 명으로 파견하였다. 곤살로는 아내 파티마의 유해를 새 수도원으로 옮겨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함께하였다. 이런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 때문에 작은 마을의 이름은 파티마가 되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교인과 무슬림 여자와의 극적인 사랑이 이루어진 이곳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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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위로부터)>
- 묵주기도의 성모 대성당(1953년 10월 13일 봉헌)
- 파티마 발현 성지에 모셔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성상
- 묵주기도 성모님의 발현 100주년 기념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프란치스코와 히야친다를 시성하셨다.
- 루치아와 히야친다의 묘소(대성당의 제단 왼쪽에 위치)(좌) 프란치스코의 묘소(대성당의 제단 오른쪽에 위치)
- 파티마 성모 발현 기념 경당(좌) 발현 기념 경당의 내부, 성모님이 발현한 위치에 모셔져 있는 성모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