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샘2
기도 덕분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조선 중기의 학자 권별이 지은 해동잡록에는 장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장님이 수십 명의 사람들과 금강산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누군가 금강산 유점사의 기둥과 지붕 형태를 물으니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장님이 불현듯 “불전의 기왓골이 120이다.”하고 답합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장님이 “처음 갔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기왓골에서 떨어진 물이 땅을 파서 오목하게 되었다. 내가 그것을 더듬어 세어보아 알게 되었다.”라고 대답하지요. 
장애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기도 하지만, 힘든 일을 거뜬히 해내기도 합니다. 예컨대 시각 장애인들이 놀라운 청력이나 촉각을 가지거나, 다리가 없는 대신 팔 힘이 어마어마하게 센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장애인들에게 알맞은 일거리를 찾아주도록 법을 정하고 점복(占卜), 독경(讀經), 악공(樂工) 같은 일은 장애인들만 독점적으로 하게 했답니다. 장애나 질병을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니지 못한 능력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대신, 오히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인정해 주고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지요. 비슷한 경우를 복음서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벳짜다 못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 
요한복음에는 벳짜다 못가에서 예수님께 매달리는 병자 이야기가 나옵니다.(요한 5,1-18) 서른여덟 해를 앓아누운 환자니까 장애인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드리는 말씀을 들어보면 몸이 아파서 서러운 데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외로운 사람의 비통한 심정까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저 연못에만 들어가면 나을 것 같은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뻔히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요한 5,5) 이 얼마나 절실하고 가슴 아픈 호소입니까. 
그런 병자에게 예수님은 일어나서 네 들것을 들고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병자가 할 수 없는 일을 보고 동정하는 대신,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고 용기를 북돋워 주십니다. 비록 아픈 처지라서 남들 하는 일은 못해도 당신 또한 제 발로 일어나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이 장애인은 벌떡 일어나서 건강해졌다고 합니다. 갑자기 없던 근육이 생겨나거나 부족했던 뼈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건강해졌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벌떡 일어난 그에게 예수님이 육신의 건강을 잘 돌보라는 말씀 대신,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당신도 당신 나름의 역할을 가지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선언이고, 당신도 다른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보지 말고 돌보면서 살라는 당부일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 세리의 기도 
마르코 복음(12,41-44)과 루카 복음(21,1-4)에 나오는 과부의 헌금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 궤에 넣은 많은 돈보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넣은 작은 동전 두 닢이 더 많다고 하십니다. 액수로야 보잘것없지만, 작은 이의 기도를 크게 받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면 그 돈은 가장 큰돈임이 분명합니다.
루카 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바리사이는 자타공인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누가 봐도 건실한 삶을 살아온 사람답게 자기 행적을 뽐내는 기도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 뵙기가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기둥 뒤에 숨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하느님께 아룁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예수님은 떳떳하지 못한 일로 재산을 불려서 빈축을 사던 세리의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성전 기둥 뒤에서 처량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한 불쌍한 영혼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작고 약한 이들의 기도 
이처럼 사람들의 눈에는 부족함이 먼저 보였던 이들의 가능성을 알아보시고 새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구성원 모두가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던 예가 교회 역사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가령 초기 교회에서 큰 역할을 했던 ‘과부들’이 그렇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고아와 과부’는 의지할 곳 없는 약한 이들을 일컫는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들을 결코 도와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교회 역사가들은 초기 교회에서 맹활약했던 ‘과부’들의 역할을 전해줍니다. 
과부들은 세례식 때 성직자들을 도왔고, 젊은 여성들을 교육하며 병자 방문이나 나그네를 돌보는 일을 책임졌으며,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힌 이들의 옥바라지를 도맡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과부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일은 그들의 기도와 간구였습니다. 기도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 성전에 나오기조차 부끄러워 자신을 숨긴 사람들, 세상살이에 시달리다가 어느덧 기도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사람들을 대신해 기도하는 이 과부들과 함께 교회는 모진 박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보시나이다 
성당에서 드러나게 봉사하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활동하는 많은 분들의 헌신과 노력은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조금만 눈에 띄는 일을 해도 ‘왜 나대느냐’는 고까운 시선을 받기도 하는 요즘이라, 남 앞에 나서서 봉사하는 것 자체가 큰 희생이지요.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시는 분들도 고마운 분들입니다. 있을 땐 몰라도 없으면 표가 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잊는 또 다른 분들도 계십니다. 기도밖에 할 것이 없다는 분들 말씀입니다. 연만해서, 질병 때문에, 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도밖에 해줄 것이 없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기도 밖에’라며 어깨를 움츠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아니 보시나이다.”(최문순 신부 역 시편 50[51],19)라는 성경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그 겸손한 기도들을 즐겨 받아주십니다. 우리 마음과 입에서 ‘기도 덕분입니다’라는 말이 좀 더 자주 울리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의 가능성을 좀 더 알아봐 주고 키워주면 좋겠습니다.